[박성희교수의 TV읽기]정치현실 속시원히 꼬집는 코미디 없나

  • 입력 2001년 5월 30일 18시 20분


한 나라의 법무부 장관이 취임하자마자 감읍해서 “성은(聖恩)…” 운운하다가 43시간만에 물러난 일을 보면서, 이보다 더 좋은 코미디 소재는 주변 나라들을 통틀어 없을 거라고 생각했다.

16대 국회가 잘 하고 있다고 생각한 국민은 2%밖에 안된다는 조사결과도 나왔다. 국민들의 ‘바꿔’ 열풍에 힘입어 젊은 신진인사들이 대거 입성한 뉴밀레니엄의 기대주가 어쩌다 그 지경이 되었을까. 희극적이다 못해 슬픈 일이다.

한 정치인은 남들이 (차례를 기다리느라고) 4시간은 넘게 걸리는 골프 코스를 3시간 반이면 돈다고 자신 있게 말했다. 평생 특권을 누리며 살아온 삶의 단면을 보여주는, 아주 재미있는 일화다. 정책을 만들어 지시한 쪽은 따로 있는데, 애꿎은 실무자를 문책한다고 난리다. 이 또한 한편의 블랙 코미디다. 주옥같은 시사 코미디의 소재들은 넘쳐나는데, 우리나라 TV 코미디는 세상사에 별 관심이 없어 보인다.

◆ 개그맨 입담 알맹이 없어

한 주를 마감하는 일요일 밤(27일), KBS와 MBC 양 방송사가 내놓은 코미디 프로그램은 여느 때처럼 끼와 재능이 넘치는 개그맨들의 재치 있는 입담으로 풍성했다. 그러나 그 입담 속 알맹이가 시원한 웃음을 끌어내기엔 빈약했다.

봉숭아 학당의 갖은 군상들, 구중 심처 대궐 속 여인의 암투, 가성과 표정연기로 일관하는 인형들의 잡담은 오늘의 우리와 너무나 동떨어진 소재들이다. 그런 프로그램에서 시청자들은 개그맨의 생김새와 표정, 말투, 옷차림 따위를 보고 웃는 것이지, 그들이 보내는 메시지에 웃는 건 아니다. 우리나라 개그맨 중 유난히 개성 있는 생김새의 사람이 많은 것도 우연은 아니다.

반면 주중에 내보내는 두 프로그램인 MBC의 ‘오늘밤 좋은 밤’ (월요일 밤 10시 55분)과 KBS2 ‘시사터치 코미디 파일’(수요일 밤 11시)은 과장된 연기보다는 메시지에 중점을 두려는 제작진의 노력이 돋보였다. ‘시사터치…’의 ‘비틀지의 의약 분업 가요 패러디’나 ‘오늘밤 좋은 밤’의 ‘총리일기’등은 즐거움과 메시지가 적절히 배합된 코너였다.

하지만 아직도 특정 정치인이나 사안을 대놓고 풍자하기에는 보이지 않는 제약이 있나 보다. ‘시사터치…’에서 대통령이 다뤄지나 했더니 성대모사에 그쳤고, 영국 코미디를 패러디 했다는 ‘총리일기’는 신토불이형 총리의 이미지와는 다소 거리가 있었다.

신랄하기로 둘째가라면 서러워하는 미국의 코미디언들에게 정치인들은 단골메뉴다. 클린턴 대통령을 매끄럽기만 할 뿐 치밀하지 못한 인간으로 풍자한 것도, 힐러리와 르윈스키를 가상 레슬링 타이틀 매치에 붙인 것도 코미디언들이었다.

불행히도 별로 개성 있게 생기지 못한 그들은 분장의 힘에 의존해 특정인을 꼬집고, 허점을 찾아내 시청자들의 속을 시원하게 해준다. 그래서 코미디를 보면 미국의 민심이 보이고, 웃음거리가 되는걸 대수롭지 않게 받아들이는 성숙한 정치문화가 보인다. 역설적이지만, 그런 검증절차를 거친 정치인들이기에 실상은 코미디같은 일들을 덜 저지르는 것이다.

◆ 정치인 '희롱'은 코미디언의 특권

챨리 채플린은 “나는 오로지 광대일 뿐이고, 그렇기에 어떤 정치인들 보다 더 높은 위치에 있다”고 말했다. 정치인을 웃음거리로 만들 수 있는 건 코미디언들의 특권이다. “코미디는 사회가 웃음으로 스스로를 보호하는 것”이라고 영국의 소설가며 극작가 프리스트리가 말했다던가. 결코 우습게 볼 수 없는 코미디의 ‘사회적 역할’ 에 대해 TV가 좀더 적극적이었으면 좋겠다.

(이화여대 교수·언론홍보영상학부)shpark1@ewha.ac.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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