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날 국가 경쟁력의 기준은 단지 국내총생산(GDP)이나 수출액이 아니다. 안정적인 공급망을 확보하고, 자국 내 제조 기반을 얼마나 튼튼히 유지하고 미래 산업으로 확장할 수 있느냐가 핵심이다. 철강산업은 여기에 가장 부합하는 산업이다. 철강은 산업 전반에 기초 소재를 공급하면서 산업 간 연계성을 형성하는 토대다. 고기능 철강재를 안정적으로 공급하는 산업생태계의 발전 덕분에 자동차, 조선, 기계, 반도체 장비, 수소 인프라, 재생에너지, 방위산업이 세계 시장에서 수출 경쟁력을 확보할 수 있었다.
그러나 지금 이 기반이 흔들리고 있다. 대외적으로는 중국산 저가 철강재의 공세, 글로벌 공급과잉 위협, 미국의 보호무역 강화, 유럽연합(EU)의 탄소중립을 내세운 무역장벽이 있다. 대내적으로는 산업용 전기요금 인상과 내수 부진 장기화로 어려운 상황에서 온실가스 감축 부담까지 강화되고 있다.
포스코를 시작으로 현대제철, 동국제강이 설비 폐쇄와 가동 중단을 선언했으며, 중소 철강기업들도 가동률이 저하하고 수익성이 악화되면서 지역경제의 위기로 번지고 있다. 설상가상 최근에는 철강-자동차 산업의 동반 해외 이전이 발표되었다. 이는 단순한 생산기지 분산이 아니라 국내 산업생태계의 이탈을 의미하며 조금 더 보태면 질 좋은 일자리와 미래 성장 잠재력의 위기를 반영한다.
분명히 가능성과 도약의 조짐도 보인다. 인공지능(AI) 기반 스마트 공정, 수소환원 제철 등 탄소 저감을 위한 혁신 기술이 빠르게 개발되고 있다. 세계경제포럼(WEF)이 선정한 ‘지속가능 등대공장’에 국내에서는 철강업체가 최초로 이름을 올렸다는 점은 철강이 여전히 미래 제조업의 중심이라는 사실을 입증한다. 하지만 이 모든 기술적 전환은 비용과 시간이 요구되며, 정부의 체계적 지원 없이는 상용화되기 어렵다.
유럽연합은 그린 전환이라는 명분 아래 공공 재정으로 상용화 설비와 인프라를 지원하고 있다. 아르셀로미탈, 잘츠기터AG, SSAB 등 글로벌 철강 기업들도 수천억 원에서 1조 원대에 이르는 지원을 받고 있다. 영국은 올해 4월 마지막 고로 설비 폐쇄를 저지하기 위해 입법을 단행하고, 국유화까지 검토하고 있다. 미국도 US스틸에 대한 일본 기업의 인수합병 시도에 대해 단호하게 대응하고 있다. 조 바이든 전 대통령은 행정명령으로 막았고, 도널드 트럼프 대통령도 철강산업 보호와 경쟁력 강화를 일관되게 주장하고 있다.
이제는 인식의 전환이 필요하다. 철강산업은 더 이상 굴뚝의 상징이 아니라, 저탄소 전환과 공급망 재정비, 경제안보라는 새로운 관점에서 다뤄져야 한다. 더 늦기 전에 철강산업에 대한 질서 있는 지원을 위해 제도적 토대를 마련해야 한다. 그리고 철강산업 지원을 위한 특별법(가칭)에는 보호나 단순한 위기대응을 넘어 경쟁 여건 정상화, 비용경쟁력 향상, 환경규제 대응 등 철강산업의 미래 전략을 담아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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