레미콘 트럭 수 14년간 묶어놓은 ‘건설노조 카르텔’ 깬다

  • 동아일보
  • 입력 2023년 8월 17일 03시 00분


코멘트

[건설현장 카르텔 깨기]
증차 막힌채 노조 기사들 시장 장악
공급 조절 제도가 운송거부 이용돼
정부 “조업 가능일 줄면 증차 가능”

부산에 있는 800채 규모 아파트 단지는 당초 올해 4월 준공 예정이었지만 두 달이 지난 6월에야 공사가 끝났다. 지난해 5월 레미콘 믹서트럭 기사들이 “운송 단가를 올려달라”며 집단 운송 거부에 나서 현장이 한 달 동안 셧다운됐던 영향이 크다. 현장 시공사 대표 A 씨는 “14년간 차량 수가 묶여 있다 보니 영업용 믹서트럭 기사들의 입김이 더 세졌다”며 “노조 소속 기사가 80%에 이르는 만큼 집단 운송 거부도 연례행사가 됐다”고 했다.

14년간 증차가 막힌 채 노조가 장악하고 있던 레미콘 믹서트럭 시장에 비(非)노조 신규 차량이 진입할 수 있는 기반이 마련됐다. 정부가 증차 여부를 결정할 때 ‘조업 가능일수’를 반영하기로 하면서다. 정부가 타워크레인에 이어 건설현장의 ‘갑(甲)’으로 자리 잡은 레미콘 믹서트럭 역시 건설현장의 이권 카르텔로 보고 혁파에 나섰다는 분석이 나온다.

16일 국토교통부와 건설업계에 따르면 국토부 산하 건설기계 수급조절위원회는 이달 11일 4차 회의를 열고 건설기계 수급 조절 예측 모형에 들어갈 변수에 조업 가능일수를 새롭게 넣기로 확정했다. 이 모형에는 건설 투자 전망, 건설물가지수, 임금, 차량 등록 대수 등이 들어가는데, 조업 가능일수가 반영된 건 이번이 처음이다. 국토부 관계자는 “레미콘 믹서트럭은 지난해 토요휴무제가 정착되며 기사들의 연간 조업일이 50일가량 줄었다”며 “현장 상황을 반영한 ‘공정한 룰’을 만들겠다”고 했다.

건설기계 수급 조절 제도는 건설기계의 공급 과잉을 막아 차주들의 생계를 보호한다는 취지로 2009년 도입됐지만 레미콘 믹서트럭의 신규 등록은 14년간 금지된 상태다. 영업용 믹서트럭이 수급 조절 대상인데, 영업용 믹서트럭 기사 중 노조 소속이 80%를 차지한다.

노조, 레미콘 트럭 80% 차지… 非노조 증차 통해 운송거부 대응


정부 “조업 가능일 줄면 증차 가능”
노조, 요구 안통하면 집단 운송거부
레미콘 57% 오를때 운임 2배 넘게↑


최근 전북의 한 레미콘 제조업체는 한국노동조합총연맹(한국노총) 산하 전국레미콘운송총연합회(전운련)와 일주일간 협상 끝에 운송비를 10%가량 올리기로 합의했다. 노조는 협상에 앞서 소속 기사들의 레미콘 믹서트럭 번호판을 모두 수거해 갔다. ‘요구를 들어주지 않으면 운행을 안 하겠다’는 엄포를 놓은 것. 레미콘 업체 관계자는 “건설현장에 레미콘을 제때 납품하지 못하면 다른 대형사에 현장을 빼앗긴다”며 “덤프트럭은 화물트럭으로라도 대체할 수 있지만, 레미콘 트럭은 대체가 안 돼 요구를 들어줄 수밖에 없다”고 하소연했다.

14년간 신규 등록이 묶여 있는 레미콘 믹서트럭의 증차 결정 요인에 레미콘 기사들의 ‘조업 가능일수’를 새로 반영하기로 한 것은 ‘건설노조 이권 카르텔’이 부실공사 등 국민 피해로 이어질 수 있다고 봤기 때문이다. 레미콘 트럭 증차가 막히면서 노조가 현장을 장악하고 집단 운송 거부, 업무방해 등을 일삼아 건설현장 셧다운(공사 중단)이나 비(非)노조 기사 업무 제한 등 피해가 끊이지 않았다는 점을 감안한 것으로 보인다. 레미콘 트럭이 수요에 맞게 증차되면 비노조 기사의 시장 진입이 가능해지고, 집단 운송 거부 때도 대체 기사로 투입돼 건설현장을 정상화시킬 수 있기 때문이다.

● 영업용 레미콘 장악한 노조…비노조는 진입 못 해

16일 국토교통부와 건설업계에 따르면 올해 7월 말 기준으로 레미콘 트럭 수급 조절 대상인 영업용 차량 2만2648대 중 80% 수준인 약 1만9000대가 노조 소속이다. 정부 추산에 따르면 전국민주노동조합총연맹(민노총) 차량이 5000대, 한국노총 차량이 1만3000∼1만4000대다. 레미콘 업체 수와 공장 수는 레미콘 수급 조절이 시작된 2009년 각각 711개, 893개에서 지난해 955개, 1082개로 늘었지만, 레미콘 차량 대수는 그대로다.

현장에서는 최근 14년간 레미콘 믹서트럭 시장이 사실상 ‘노조판’이 되면서 노조가 권력이 됐다는 증언이 잇따른다. 증차가 없는 탓에 영업용 레미콘 믹서트럭 기사가 되려면 기존 번호판(면허)을 사서 진입해야 하는데, 번호판 값으로만 3000만∼4000만 원을 내야 한다. 여기에 대형 레미콘 제조업체 공장에서 일감을 받으려면 각 공장 상조회에 가입비 명목으로 이른바 ‘마당비’를 내야 하는데 이 돈이 최대 2000만 원에 육박한다. 상조회는 대부분 지역별 레미콘 노조 지회에 소속돼 있다.

대형 레미콘 제조업체 관계자는 “영업용 번호판을 사서 신규 기사를 고용하고 싶어도 노조(상조회) 허락을 받아야 한다”며 “노조 가입을 안 하면 사실상 고용이 힘들다”고 했다. 건설업계에 35년째 종사하고 있는 B 씨는 “폐쇄적인 구조에서 노조 인력이 계속 쌓여 왔고, 이제 노조는 노동자의 권리를 지키기 위한 것이 아니라 일부 간부들이 ‘왕 놀이’를 하는 놀이터가 돼 버렸다”고 비판했다.

현장을 장악한 노조가 운송비 인상을 요구하며 집단 운송 거부에 나서면 건설현장도 속수무책으로 멈출 수밖에 없다. 지난해 7월 수도권 레미콘 운송 차주가 모인 레미콘운송노조가 집단 운송 거부를 했고, 같은 해 10월에는 레미콘운송노조 소속 수도권 5개 지부가 2주 넘게 서울 사대문 내 레미콘 운송을 거부해 세운지구 아파트, 한국은행 별관 등의 공사가 줄줄이 중단됐다. 지난해 12월에는 민노총 부산·울산·경남 레미콘 지회가 화물연대 동조 파업을 하면서 지역 건설현장 185곳이 셧다운됐다.

현장이 노조에 휘둘리면서 레미콘 운반비는 그동안 2배 이상으로 올랐다. 레미콘업계에 따르면 수도권 기준 레미콘 가격은 수급조절위가 처음 생긴 2009년 대비 57.8%(5월 기준) 인상됐다. 반면 운반비는 내년까지 129.9% 인상된다. 업계 관계자는 “노조 요구를 수용하다 보니 운반비가 비정상적으로 올랐다”고 했다.

● “건설기계 수급조절위, 기울어진 운동장”

레미콘 차량 증차가 막혔던 것은 국토부 산하 건설기계 수급조절위원회 구성 자체가 노조에 유리했던 영향이 크다. 기존 건설기계 수급조절위는 정부·지자체 소속 당연직 위원 6명과 위촉직 위원 9명으로, 위촉직 위원은 사측 1명, 노조 측 3명, 공익위원 5명이었다. 올 초 감사원 지적을 받고 나서야 사측 3명, 노조 측 3명, 공익위원 3명으로 위촉직 구성이 바뀌었다.

레미콘 노조는 최근 서울 여의도와 정부세종청사 국토부 앞에서 ‘강력한 투쟁으로 수급 조절 연장 사수하라’라는 현수막을 걸고 규탄 집회를 하는 등 반발했다. 노조 측은 “노조 탄압이라는 근시안적 시각으로 수급 조절을 해제하려는 것”이라고 했다.

증차 여부는 이르면 8월 말 국토부가 잠정 결론을 낸 뒤 올해 말 국무조정실 규제개혁 심의를 거쳐 최종 결정된다. 다만 증차 여부의 다른 변수인 내년도 건설 투자 전망이 좋지 않아 당장 내년부터 증차될지는 미지수다. 박선구 건설정책연구원 연구위원은 “신규 차량이 진입해 경직된 시장 구조가 개선되고 레미콘 트럭 수요와 공급이 제대로 반영될 수 있는 기반을 만든 것”이라고 했다.


최동수 기자 firefly@donga.com
정순구 기자 soon9@donga.com
이축복 기자 bless@donga.com


#레미콘#건설노조 카르텔
  • 좋아요
    0
  • 슬퍼요
    0
  • 화나요
    0
  • 추천해요

댓글 0

지금 뜨는 뉴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