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설]‘양적완화 꼼수’ 접고 좀비·국책은행 구조조정 제대로 하라

  • 동아일보

‘한국형 양적완화’에 나서라는 정부 압박에 손들었던 이주열 한국은행 총재가 외국서 다시 제 목소리를 냈다. 아세안+한중일 재무장관·중앙은행총재 회의 참석차 독일 프랑크푸르트를 방문한 그가 4일(현지 시간) 기자간담회에서 “국책은행에 직접 돈을 대주는 출자보다 나중에 자금을 회수할 수 있는 대출이 적합하다”고 말했다. 한은의 발권력으로 산업은행과 수출입은행의 자본을 늘려주는 한국판 양적완화에 사실상 반대한다는 뜻을 분명히 한 셈이다.

이 총재는 “한은에서는 한국판 양적완화란 표현을 하지 않는다”며 ‘국책은행 자본 확충’이 지금 적절한 표현이라고 말했다. 같은 회의에 참석한 유일호 경제부총리도 “국책은행 자본 확충을 위한 추가경정예산(추경) 편성을 검토할 수 있다”고 했다. 추경 가능성을 한사코 부인하던 종전 입장을 뒤집은 것이다.

한국형 양적완화라는 헷갈리는 명칭 대신 국책은행 자본확충이라는 정명(正名)을 찾은 것은 그나마 다행이다. 박근혜 대통령은 지난달 “기업 구조조정 지원을 위해 필요한 재원은 선진국들이 펼친 무차별적인 돈 풀기식의 양적완화가 아닌 선별적 양적완화 방식을 적극 검토할 필요가 있다”고 했다. 디플레이션을 막기 위한 선진국의 양적완화보다 한국형 양적완화가 훌륭한 정책이라는 느낌을 주지만 쉽게 말하면 부실기업에 퍼주느라 부실해진 국책은행에 돈을 찍어 주라는 것이 한국형, 선별적 양적완화였다.

한은이 돈을 대서 기업 부실을 털어내는 것은 기업 부채를 중앙은행에 떠넘기는 무리수다. 결국 국채의 신뢰도가 떨어져 최악의 경우 글로벌 자금이 이탈할 수도 있다. 정부는 국회 동의가 필요 없고 국가채무가 늘지 않는다며 한국형 양적완화 운운했지만 애초 한은은 쉽게 돈을 빼 써도 되는 만만한 곳간이 아니다. 구조조정의 큰 그림만 제시해야 할 박 대통령이 너무 세세히 개입해 논란을 키운 측면이 있다.

정부는 그제 구조조정 협의체 회의 직후 “자본 확충 방식을 상반기 내 정하겠다”는 2쪽짜리 참고자료를 냈다. 구조조정이 시급하다며 한은의 팔을 비틀던 때와는 딴판이다. 유 부총리가 재정으로 국책은행 자본을 늘려주고, 한은이 국책은행에 대출을 해주는 정책 조합에 합의했다면 시간을 끌 이유가 없다.

문제는 산업은행·수출입은행이 대우조선해양의 부채를 1년 만에 6800%포인트나 키우고도 자기들끼리 실적수당 잔치나 벌이는 도덕적 해이다. 산은 노조는 정부의 성과연봉제 도입에 반대한다며 4일 본점에서 집회까지 벌였다. 이들 채권단은 현대상선, 한진해운에 이어 한진중공업도 자율협약을 허용할 예정이다. 대우조선해양도 포기해선 안 된다는 주장도 정부 안에 팽배해 있다고 한다. 엄격한 구조조정의 원칙을 무너뜨리면 기업 부실을 수십조 원 혈세로 메워주는 것밖에 안 된다. 좀비기업을 방치한 국책은행 문책 없이 전 국민에게 경쟁력 잃은 기업까지 살려내라고 부담을 지울 순 없다.
#양적완화#한국은행#국책은행#자본확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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