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데스크 진단]한국야쿠르트 ‘사람과 기계의 만남’

  • 동아일보
  • 입력 2016년 4월 11일 03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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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선미 소비자경제부 차장
김선미 소비자경제부 차장
생각해 보니 당신은 언제나 그 자리에 계셨어요.

오래전부터 줄곧…. 저와 같은 아파트 단지에 살던 친정아버지가 돌아가셨을 때엔 아파트 경비아저씨들과 함께 슬퍼하셨죠.

제 손을 붙잡고 동네를 걷는 딸에겐 “엄마랑 오늘 좋은 시간 보내 좋겠다”고 활짝 웃어주시죠. 가끔 출근길에 마주치면 전날 유치원 버스에서 내리던 제 아들의 표정을 알려주기도 하시고요. 그래요. 미처 깨닫고 살지 못했을 뿐 당신과 함께 살아가고 있었어요.

최근에야 전해 들었습니다. 저희 아파트에 사는 30대 후반 이웃이 꼬마 때부터, 그러니까 32년째 당신이 지금 그 자리에 계심을.

이 글을 쓰겠다고 당신의 이름도 나이도 며칠 전에야 여쭤 보았어요. 어떻게 당신을 불러야 할까요. 항상 우렁차고 따뜻하게 저희를 챙겨주시는 아주머니가 어느덧 61세라니. ‘신희숙 씨’, ‘신희숙 아주머니’, ‘신희숙 선생님’…. 이제야 알게 된 당신의 성함이 죄다 입안에서 어색하게 맴돌아요. 당신은 우리 동네의 오랜, 정다운 ‘야쿠르트 아주머니’이신 걸요.

흐드러진 동네 벚꽃 아래에서 당신의 이야기를 처음으로 들어보았습니다.

“1979년에 결혼한 이후 남편의 사업이 줄줄이 망했어요. 절망에 빠져 있을 때 한 동네 아주머니가 ‘애기 엄마, 그러면 야쿠르트 해봐’ 그러더라고요. 그렇게 1984년부터 야쿠르트 배달 일을 시작했어요. 창피해서 제가 사는 동네에서는 조금 떨어진 동네로 와서요. 엄마가 밖에 나가 일하면 아이들이 행여 비뚤어질까 봐 일찍부터 아들은 운동을 시켰어요. 중학교 때부터 럭비 팀 주장을 하더니 연세대, 상무 나와 대기업에 다녀요. ‘죽을 마음이면 뭘 못 하겠느냐’는 마음으로 열심히 일하다 보니 아이들 다 가르치고 시집 장가 보내고 좋은 고객들을 만났네요. 이젠 노후를 위해 신나게 일해요. 오전 6시부터 일을 시작해 오후 1시쯤 정기 고객들에게 배달을 마치고 그 이후 시간에는 꽃집 앞에서 남은 제품을 팔죠.”

한 달에 250만 원 정도를 버신다고요. 존경심이 듭니다. 고등학교 나와 경리일 하셨다는 당신은 고객들과 소통하기 위해 책도 많이 읽고, 동네 외국인 주민들과는 영어와 일본어로 대화하시잖아요. 어떻게 단골 고객을 확보하고 관리하시는지 궁금했습니다.

“신뢰가 제일 중요한 것 같아요. ‘저 아줌마는 제대로 된 제품만 팔고 약속을 지킨다’는…. 길 가다가 야쿠르트 사 드시는 분들에게는 ‘일정한 시간 집으로 배달해 드릴 테니 드셔 보시라’고 하죠. 제품이 밀릴 것 같다고 하면 ‘그럼 주 3회 배달은 어떨까요’라고 제안하고요. 일하다가 실수한 점이 있다면 곧바로 인정합니다. 고객을 이기려고 하는 순간 고객은 떨어져 나가니까요.”

오랫동안 지켜본 당신의 모습이 떠올랐어요. 길에서 우는 꼬마들에게 캐러멜을 쥐여주시는 당신, 혼자 사시는 할머니 고객이 아팠을 때 손수 죽을 끓여다 드리던 당신, 차비가 없다는 동네 학생에게 1000원짜리 두 장을 꺼내주시던 당신…. 설령 가까운 미래에 드론과 로봇이 야쿠르트 배달을 대체한다 해도 당신이 건네준 따뜻한 마음까지 그들이 배달할 수 있을까요. 기술도 필요하지만 당신처럼 사람의 마음을 얻는 것이 먼저이겠죠.

흥미로운 건 당신이 얼마 전부터 최신식 신형 전동 냉장카트를 몰고 다니는 겁니다. 한국야쿠르트가 전국 1만3000명의 야쿠르트 아주머니들이 보다 편하게 일하도록 공급한 카트입니다. 냉장전문회사 오텍캐리어, 전기카트회사 대창모터스 등과 함께 개발했고 르노자동차에 공급되는 LG화학의 2차전지가 장착됐다고 하죠. 한국야쿠르트는 내년까지 800억 원을 투자해 지금 보급된 3800대(대당 800만 원)를 1만 대까지 늘리겠다고 합니다. 이달 4일 월스트리트저널은 한국야쿠르트의 ‘새로운 배달 전동차 문화’를 1, 2면에 대서특필하면서 ‘야쿠르트 아주머니가 485파운드의 냉장고를 부착한 세그웨이(1인용 이동식 전동기기)처럼 보이는 첨단기계 위에 서 있다’고 묘사했습니다.

당신은 “위생적이고 신선한 제품을 배달할 수 있게 돼 고객 앞에서 자랑스럽다”며 “나중에 무릎이 아프더라도 전동카트 덕분에 계속 일할 수 있을 것 같다”고 했습니다. 한국야쿠르트에 물어보니, 조만간 당신의 전동차에는 사물인터넷 기술도 접목돼 고객들에게 맞춤형 위치기반 서비스도 할 수 있게 된다고 합니다.

주변 사람의 마음을 읽고 채워 주는 것의 의미를 당신이 오래오래 가르쳐 주셨어요. ‘신용이 비결’이라는 말이 성공한 사업가의 전유물이 아님을, ‘알파고와 드론 시대’이지만 인간이 기술에 종속되지 않을 수 있는 방법을…. 당신을 만난 동네 골목길에도, 제 마음에도 연분홍 벚꽃 잎이 예쁘게 내려앉았습니다.

김선미 소비자경제부 차장 kimsunmi@donga.com
#한국야쿠르트#데스크 진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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