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日本 100년 기업을 가다]<29>한우물 파다 전환 부라더공업

  • 입력 2008년 5월 30일 02시 58분


‘부라더미싱’의 구멍 디지털로 기웠다

《“30년 전 시집올 때 친정어머니가 적금을 깨서 사주신 재봉틀이 고장 났습니다. 어떻게 해서든 고치고 싶은데 좋은 수리점 없나요?” 일본의 인터넷 게시판에는 이런 글이 종종 눈에 띈다. 1970년대까지만 하더라도 재봉틀은 일본 여성들이 결혼할 때 반드시 지참해야 할 혼수품이었고 결혼 후에는 늘 곁에 두고 살아야 하는 가재도구였다. 그러나 맞벌이가 늘어나고 세탁 서비스가 발전하면서 가정용 재봉틀은 생활필수품의 자리에서 급속히 밀려났다. 》

1980년대이후 재봉틀 수요 급감… 심각한 경영위기

저가 팩스로 美시장 휩쓸어… 통신기기업체로 부활

세계시장 수요 역시 매년 감소를 거듭한 끝에 이제는 700만 대를 갓 넘기는 수준이다.

재봉틀 수요가 정점을 넘긴 1980년대 이후엔 대부분의 재봉틀 제조업체가 생사의 갈림길을 수없이 지나야 했다. 한국에 ‘부라더미싱’으로 널리 알려진 부라더공업도 예외일 수는 없었다.

○ 이젠 정보통신기기 제조업체

일본 아이치(愛知) 현 나고야(名古屋) 시 미즈호(瑞穗) 구의 호리타(堀田)전철역을 나와 큰 도로를 따라 3분 정도 걸어 내려가면 6층짜리 부라더공업 본사가 모습을 드러낸다.

부라더공업 개요
구분내용
창업 연도1908년
업종정보통신기기(팩스 프린터 등), 재봉틀
연 매출액5663억 엔
종업원2만3809명
본사 소재지아이치 현 나고야 시 미즈호 구 나에시로
홈페이지www.brother.co.jp

지진 대비를 위해 기둥 강화 공사를 한 것을 제외하면 외관이나 내부구조 모두 47년 전 완공 당시 그대로의 모습이다. 이 회사가 낡은 본사를 47년간이나 ‘짜깁기해’ 사용하는 이유는 형편이 어려워서가 아니다. 도요타자동차 등 다른 나고야 기업들도 갖고 있는 이 지역 특유의 ‘짠돌이 문화’ 때문이다.

부라더공업의 경영은 지난해 결산에서 매출액과 영업이익, 경상이익이 모두 사상 최고치를 기록할 정도로 탄탄대로를 달리고 있다. 3월에는 여세를 몰아 “5년 안에 연간 매출액을 1조 엔으로 늘리겠다”고 공식 선언까지 했다.

하세가와 도모유키(長谷川友之) 이사는 “매출액을 5년간 2배 가까이 늘리겠다는, 약간 무리다 싶은 목표를 내걸 수 있었던 것은 팩스, 프린터, 디지털 복합기 등 정보통신기기 부문이 호조를 보이고 있기 때문”이라고 설명했다.

그는 “재봉틀이 부라더공업의 뿌리이자 기본이라는 사실에는 변함이 없지만 이제 재봉틀이 매출에서 차지하는 비중은 20%에도 못 미친다”면서 “지금은 매출의 70% 이상이 정보통신기기 부문에서 나온다”고 덧붙였다.

○ “성공체험은 개혁의 적”

창업주의 후손인 야스이 요시히로(安井義博) 회장이 사장에 취임할 당시인 1990년 부라더공업의 경영은 심각한 위기를 맞고 있었다.

재봉틀의 수요는 하강곡선을 그리고 있었고 사업 다각화를 위해 1950년대에 진출한 전자사업의 가격경쟁력도 위태위태했다.

야스이 사장은 최고경영자(CEO) 취임을 계기로 무사안일에 젖은 경영체질을 일신하고 저수익 사업구조를 대대적으로 구조조정하려고 했지만 사내의 저항은 완강했다.

기존 임직원들은 과거 재봉틀 사업의 성공 체험을 바탕으로 개혁에 사사건건 제동을 걸고 나섰다. 운도 따르지 않았다. 야스이 사장이 신사업 담당 임원 시절부터 깊숙이 간여한 게임자동판매기, 컬러복사기, 팩스 등의 신사업은 거의 실패로 결론이 났거나 나는 중이었다. 재봉틀과 전자사업 분야의 임직원들은 “돈 안 되는 신사업을 빨리 접으라”고 야스이 사장을 압박했다.

○ 저가 팩스로 ‘역전 홈런’

안팎으로 궁지에 몰린 야스이 사장은 1991년 도박에 가까운 승부수를 띄웠다. 1년 안에 399달러짜리 저가형 팩스를 개발해 미국 시장을 공략하겠다고 선언한 것.

당시 부라더공업이 통상적인 노력을 통해 낮출 수 있는 원가의 한계는 699달러였다. 판매물량이 많아 ‘규모의 경제’가 가능한 대형 업체들도 499달러 미만 제품은 내놓지 못하고 있었다.

야스이 사장은 사운을 건 특별 프로젝트를 성공시키기 위해 가능한 한 기존 사업 분야에서 성공해 본 경험이 없는 신진들을 뽑아 개발팀을 구성했다. 고정관념을 철저히 배제하기 위한 조치였다.

또 구매부서가 간여하면 기존 거래처와의 관계 때문에 원가 절감에 한계가 있을 것으로 생각해 개발팀이 부품 조달도 직접 담당하도록 했다.

이런 방식은 예상 밖의 성공으로 이어졌다. 개발팀원들이 전국 방방곡곡을 누비고 찾아다닌 끝에 팩스에 부착되는 종이절단기의 원가를 1000엔에서 500엔으로 낮춘 것이 한 가지 예. 이렇게 해서 1992년 6월 선보인 399달러짜리 ‘팩스 600’은 미국의 팩스시장을 강타하면서 순식간에 히트상품 반열에 올랐다.

○ “창업보다 어려운 게 수성(守城)”

‘팩스 600’의 성공은 재봉틀 제조업체에서 정보통신기기 제조업체로 변신하려는 부라더공업에 돌파구를 제공했다. 막혔던 곳이 한번 뚫리자 팩스, 레이저프린터, 디지털 복합기 등 다양한 제품군에서 효자상품이 줄줄이 터져 나왔다.

10년이 넘는 긴 세월이 걸렸지만 변신을 통한 부활은 한마디로 성공이었다. 2003년 니혼게이자이신문 계열인 닛케이금융신문이 기관투자가들을 대상으로 실시한 설문조사 결과에서 야스이 회장은 도요타자동차, 캐논의 경영자와 함께 ‘1년간 기업 가치를 높인 경영자’ 순위 2위에 올랐다.

야스이 회장은 회고록에서 “정보통신기기 제조업체로의 변신은 사실상 창업이나 다름없었다”면서 “이 같은 길을 구태여 선택한 이유는 기존 사업을 수성하는 일이 훨씬 어렵기 때문”이라고 설명했다.

나고야=천광암 특파원 iam@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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