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빚 권하는 한국사회]‘대부 공화국’

  • 입력 2007년 6월 9일 03시 32분


“빚진 죄인.” “빚지고는 발 뻗고 잠 못 잔다.”

빚을 진 사람은 마음이 편치 못하다는 것을 표현한 속담이다.

하지만 최근 빚에 대한 심리적 태도가 급속히 바뀌고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 빚을 낼 수 있는 것이 곧 능력이고, 남의 돈을 빌려서라도 잘 투자해서 성공하면 된다는 것.

빚에 대한 한국인의 사회적 인식 변화를 주제어로 살펴봤다.

○빚쯤이야…

여론조사기관인 메트릭스가 2월 20∼50대 성인 남녀 500명을 대상으로 실시한 설문조사에 따르면 응답자의 35.6%가 “부채도 능력”이라고 대답했다.

삼성경제연구소가 실시하는 소비자태도조사에서 2002년 2분기(4∼6월)와 2007년 2분기의 가계부채에 대한 인식을 비교해 보면 최근 5년 사이에 빚에 대한 생각이 바뀌고 있다는 사실이 뚜렷이 드러난다.

“가계부채가 있다”는 응답자가 2002년도에는 47.4%였으나 올해는 52.0%로 증가했다. 서울에서는 42.7%에서 52.2%로 10% 포인트 가까이 늘었다. 보유 중인 부채가 과다하다고 생각하느냐는 질문에 대해선 “그렇다”는 응답이 37.4%에서 19.9%로 오히려 감소했다. 서울에서는 36.6%에서 26.0%로 감소했다.

2002년 596조 원이었던 가계부채가 지난해 671조 원으로 늘어난 현실과는 전혀 다른 인식이다. 빚도, 빚을 진 가구도 늘어났지만 빚을 대수롭지 않게 생각하는 정서는 더 확산된 것이다.



빚 무서운 줄 몰라

가구당 평균부채 2915만 원→3668만 원

‘빚 많다고 생각’ 되레 37%→19%로 감소

○‘빚 갚기’는 어려워지고 있다

빚은 정말 ‘만만해진’ 것일까. 현실은 그 반대다. 빚을 줄이기는 갈수록 어려워지고 있다. 씀씀이 규모를 소득이 따라가지 못하기 때문이다.

개인 소득에서 이자, 저축, 세금을 빼고 실제로 사용할 수 있는 개인 가처분소득의 증가율은 외환위기 이후 9년간 연평균 4.7%였다. 이전 9년간의 평균치가 14.7%인 것을 감안하면 소득 증가세가 3분의 1로 둔화된 셈이다.

가처분소득 증가세는 꺾였지만 가계부채 증가율은 외환위기 직전 9년간 평균 16.1%, 외환위기 이후 9년간 14.6%로 비슷했다.

한국금융연구원 박종규 선임연구위원은 “소득 증가가 구조적으로 부진해지면서 지출을 조금만 늘려도 부채가 늘어나게 됐다”며 “외환위기 이후 빚의 악순환 고리가 구조적으로 정착됐다”고 진단했다.

박 위원은 “그런데도 빚을 ‘만만하게’ 여기는 인식이 확산되는 것은 왜 그런지 이해할 수 없다”고 말했다.

빚의 질도 변했다

성인 35% “빚 잘내는 것도 능력으로 생각”

생계형 부채보다 소비형 부채로 패턴 변화

○빚내서 투자한다

메트릭스의 조사에서 응답자의 41%가 “수익이 예상된다면 빚을 내서라도 투자할 생각”이라고 대답했다.

회사원 김모(38) 씨는 2003년 1월 은행에서 3억 원을 대출받아 서울 강남 지역에 4억8000만 원을 주고 산 43평형 아파트 값이 지난해 말에는 10억 원 가까이로 뛰었다. 과감하게 빚을 내서 ‘베팅’을 해 4년 만에 2배에 가까운 수익을 올린 셈이다.

주택담보대출을 받을 때 5%대였던 금리가 6%를 넘어서면서 매달 갚아야 할 원리금이 240만 원 정도로 월수입의 절반을 넘고 올해부터는 종합부동산세까지 내야 한다.

지금이라도 아파트를 팔면 빚을 갚을 수 있지만 그런 생각은 ‘꿈에도’ 하지 않는다. 메트릭스의 조사 결과에서도 “부채를 갚을 능력이 있어도 굳이 부채를 바로 갚을 필요가 없다”고 생각하는 비율이 32.6%나 됐다.

김 씨는 “다시 빚을 내서 세금을 내는 한이 있더라도 이 아파트가 재건축 대상이 돼 또 한 번 대박을 터뜨릴 때까진 버틸 것”이라고 말했다. 그는 부동산 가격 정체가 장기화되면 이번에는 대출을 받아 최근 활황인 주식시장에 뛰어들까 생각하고 있다.

○생계형에서 소비형 빚으로

민주노동당 경제민주화운동본부 송태경 정책실장은 “아이 돌잔치를 하기 위해 신용카드를 사용한 것이 발단이 돼 부채에 허덕이는 경우도 있다”고 말했다. 그는 “옛날에야 돈이 없으면 아예 안 하거나 간단히 했는데 돈을 쉽게 빌릴 수 있는 구조가 되면서 굳이 안 빌려도 될 돈을 꾸는 경우가 많다”고 분석했다.

주부 최모(56) 씨는 지난해 대학을 졸업하고 중소기업에 취직한 막내딸(23)만 보면 한숨이 나온다. 명문대를 나온 것도 아니고 해외유학을 다녀온 것도 아닌 딸이 그 어려운 취업난을 뚫고 직장을 잡은 것이 기특하긴 하지만 요즘 부쩍 씀씀이가 커져서 걱정이다.

취직 후 생전 처음 만든 신용카드를 조심조심 쓰던 것은 처음 몇 달. 점점 고급 핸드백이나 구두 같은 ‘명품’을 아무렇지 않게 할부로 사기 시작하더니 이제는 돈이 모자라면 현금서비스까지 받는 눈치다. 우연히 딸의 카드대금 결제가 몇 번 연체되기도 하고 카드가 몇 개인지도 모를 정도로 많아졌다는 사실을 알게 됐다. 최 씨의 걱정에도 정작 본인은 태연하다. “엄마 걱정 마세요. 요즘 다 그래. 카드도 많이 써야 신용이 좋아지는 거라고요.”

메트릭스의 조사에서 연령대별 응답 실태를 비교해 보면 50대는 빚에 대해 여전히 ‘보수적인’ 인식을 갖고 있지만 20, 30대에선 빚을 대수롭지 않게 생각하는 인식이 더 강한 것으로 나타났다.

○저소득층 어깨 누르는 빚

‘감당하기 어려운 빚의 무게’는 저소득층에게 더욱 무겁게 느껴진다. 소득 수준에 따라 5개 계층을 나눌 때 최하위 계층(전체 가계의 20%)은 외환위기 이후 매년 적자를 면치 못하고 있다. 올해 1분기(1∼3월) 가계수지 동향에서도 최저 소득계층의 적자율은 56.5%. 가처분소득의 56.5%만큼 돈을 더 써 고스란히 빚으로 떠안은 셈이다.

그러면서도 소비성향은 중산층을 따라간다. 서울대 이소정 박사(사회복지학)는 학위논문에서 저소득층의 소비성향(소비지출÷가처분소득)이 다른 계층을 닮아 가고 있다고 지적했다.

이 박사가 저소득층 주부 12명을 심층 면담한 결과 “직장에서 정장을 입는 날에 나만 못 입으면 난처하다”며 옷을 사는 ‘사회적 관계 지출’이나 “밥만 먹고 일만 하고 살면 그게 사는 건가”라고 생각하는 ‘여가지출’, “힘든 건 마찬가진데 즐기고 외식도 하고 보자”는 지출이 눈에 띄었다.

저소득층의 지출에는 개인교통요금(승용차 구입 및 유지비)과 통신비(휴대전화 구입과 통화요금)의 비중이 컸다. 빚을 내서라도 차와 휴대전화는 있어야 한다는 인식이 보편화됐다는 것.

한양대 김재원(경제학) 교수는 “소득 이상으로 지출하거나 상환 능력을 생각하지 않고 돈을 빌리는 경향이 뚜렷해져 만성적 가계 적자와 함께 장기적으로 저축률을 떨어뜨려 경제에 악영향을 줄 것”이라고 우려했다.

김기현 기자 kimkihy@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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