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디지털 키즈]<4>교실 권력지도 변화

  • 입력 2005년 2월 6일 17시 06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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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난 인형옷 만들기짱”‘인형 옷 만들기 짱’으로 불리는 최모 양이 미니 홈페이지에 자신이 만든 인형 옷을 입힌 사진을 올려놓은 장면.
“난 인형옷 만들기짱”
‘인형 옷 만들기 짱’으로 불리는 최모 양이 미니 홈페이지에 자신이 만든 인형 옷을 입힌 사진을 올려놓은 장면.
30대 이상은 교실에서 막강한 영향력을 행사하던 동창생에 대한 기억을 대부분 갖고 있다. 이들은 싸움을 잘해 ‘대빵’으로 불리거나, 공부를 잘하고 독선적인 성격의 반장 같은 사람들이다. 하지만 요즘 교실에서는 ‘군림하는 1인자’는 존재하지 않는다. 디지털 키즈의 등장은 교실의 권력지도를 바꿔놓았다.

○ ‘엄석대’가 사라진 이유

요즘 학교에서는 싸움을 잘한다고 해서 다른 학생을 괴롭히거나 영향력을 행사하기가 어렵다. 폭력적인 성향의 학생은 여전히 있지만 급우들이 폭력을 용납해 주지 않는다. 이문열의 소설 ‘우리들의 일그러진 영웅’의 주인공 엄석대 같은 사람은 더 이상 나오기 어려운 환경이다.

경기 성남시 풍생고 김태훈 교사(29)는 “학생들의 권리의식이나 주체성이 높아지면서 자신이 맞거나 괴롭힘을 당하면 참지 않고 바로 담임선생님을 찾는다”며 “경찰에 바로 신고하는 사례도 많다”고 말했다. 학부모도 자식이 괴롭힘을 당한다는 사실을 알게 되면 학교보다는 경찰에 신고를 한다.

서울 노원구 하계지구대의 한 경찰은 “하루에 한 건 정도 청소년 피해자들이 직접 폭력피해 신고를 해 온다”며 “폭력피해 신고를 한 학생들은 형법이나 처벌규정에 대해 자세히 알고 있으며 법에 따른 강력한 처벌을 요구한다”고 말했다.

싸움만 잘하거나 공부만 잘하는 학생은 더 이상 경외와 부러움의 대상이 아니다. 영향력도 없다. ‘짱’이라고 불리지도 않는다.

교사를 대신해서 모든 일을 주도적으로 처리하던 지배적인 성향의 반장도 찾기 어렵다. 학생들이 교사의 개입 없이 투표를 통해 반장을 선출하기 때문에 권위적이거나 군림하는 성격의 학생은 반장이 될 수도 없다.

서울 아현중 한혜성 교사(38)는 “학생들이 싫어하는 지시는 반장을 통해 전달하면 실행이 되지 않는다”며 “학생들이 반장이라고 특별한 권위가 있다고 인정하지 않으며 반장을 교사의 지시를 전달하는 메신저나 회의 주재자로 여긴다”고 설명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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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교실의 권력이동

요즘 교실에서는 특정인 몇 명이 강력한 영향력을 행사할 수 없다.

게임, 디지털카메라, 인터넷소설, 만화, 음악, 퀼트나 구슬공예, 패션, 컴퓨터 등 학생들이 관심을 갖는 각 분야에서 전문적인 지식을 갖고 있는 학생들이 인기가 있거나 전문가로서 대접을 받는다.

강원 동해시 묵호여중 3학년 최모 양(16)은 성적은 중하위권이지만 반 친구들이 가장 부러워하는 학생이다. 최 양은 인형 옷 만들기 카페 ‘바비옷 방’에서 최고의 디자이너로 꼽힌다. 최 양이 만든 인형의 사진을 온라인에서 보고 돈을 주고 구입하는 사람들이 늘면서 최 양은 이달 중순 온라인상에서 자신의 옷 가게를 열 예정이다. 학교에서 꼼짝 않고 바느질만 하던 최 양을 ‘할머니’라며 놀렸던 반 동료들도 이제는 최 양을 놀리지 않는다.

경기 안양시 부흥고 2년 신모 군(17)은 학교에서 유명인사다. 스타크래프트 게임을 잘해 온라인 대회에 나가서 입상도 했다. 신 군은 “부모님은 싫어하시지만 게임을 잘하니까 친구들이 인정도 해주고 항상 아이들이 내 주위로 와서 기분이 좋다”고 말했다.

각 분야의 ‘짱’이라 불리는 이들은 해당 분야에 대해 거의 전문가 수준의 지식을 갖고 있다. 짱이라고 모든 일에 영향력을 갖는 것은 아니다. 급우들이 해당 분야에 대해서만 실력과 영향력을 인정해줄 뿐이다.

광주 광주중 이승대 교사(52)는 “각 분야에 두각을 나타내는 학생이 많아지면서 교사들도 학급 홈페이지운영, 학교 축제, 장기자랑 등 사안마다 다른 학생들이 주도하도록 한다”며 “과거처럼 특정 학생이 모든 일을 주도하도록 하면 그 학생은 ‘왕따’가 되기 쉽다”고 말했다.

○ 인터넷은 변신의 기회

인터넷이 ‘짱’만을 탄생시키는 것은 아니다.

소극적인 성격의 중학생 박모 양(14·서울 강서구)은 채팅 때 쓰는 다양한 손글씨를 만드는 온라인 모임에 가입했다. 박 양은 예쁜 손글씨 솜씨로 온라인상에서 유명해졌고 학교친구들도 이 사실을 안 이후 박 양에게 모여들었다. 박 양의 성격도 밝아졌다.

내성적인 학생이 인터넷에서 적극적인 모습으로 변신하고 사이버 공간의 동료들로부터 인정을 받은 뒤 현실의 성격도 변하는 모습은 흔히 볼 수 있다.

연세대 심리학과 황상민 교수는 “인터넷은 청소년에게 ‘새로운 나’를 실험해 보거나 지금 그대로의 모습을 인정해 주는 사람들을 만날 수 있는 기회를 제공한다”며 “디지털 키즈는 인터넷의 이런 특성을 본능적으로 활용할 줄 아는 세대”라고 설명했다.

특별취재팀

▼더 심각해진 ‘집단 괴롭힘’▼

《‘왕따’는 고치기 어려운 인간의 못된 속성일까. 사회나 학교에서 특정인을 집단으로 괴롭히거나 따돌리는 현상을 막기 위한 대책은 마련한 지 오래됐지만 폭력예방재단이나 서울시립청소년정보문화센터에 접수되는 피해건수는 매년 늘고 있다. 적극적인 신고문화를 감안할 때 신고건수가 늘었다고 왕따가 늘었다고 판단할 수는 없다. 그러나 다양성이 꽃핀 디지털 키즈의 교실에서도 왕따 현상은 사라지지 않고 있다는 사실은 분명하다.》

▽24시간 괴롭힘=작년 10월 ‘왕따’당하던 서울지역의 여고 1년생 B 양이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반 친구들이 끊임없이 ‘넌 우리 반 따야’ ‘재수 없어’ ‘꺼져’라는 내용의 e메일을 끊임없이 보냈고 이를 견디다 못한 B 양은 자살을 선택했다.

인터넷과 휴대전화 등 디지털 기기가 확산되면서 왕따 학생을 괴롭히는 다양한 방법이 등장하고 있다.

가장 흔한 수법은 욕설이 담긴 문자메시지나 e메일 보내기. 청소년폭력예방재단 임재연 상담실장(38)은 “왕따 피해학생은 과거에는 학교를 벗어나면 혼자만의 공간에서 쉴 수 있었다”며 “그러나 요즘은 문자나 e메일 채팅을 통해 욕설을 듣거나 공격을 받는 등 24시간 괴롭힘을 당한다”고 말했다. 채팅에 왕따 학생을 일부러 초대했다가 말을 걸지 않거나 왕따 학생이 학급 홈페이지나 채팅 사이트에 로그인을 하면 모두 로그아웃을 해 버리기도 한다. 왕따 학생의 패스워드나 ID를 도용해 왕따 학생의 ID로 학교 홈페이지에 선생님이나 선배에 대한 비방 글을 올려 곤란하게 만들기도 한다.

더욱 심각해진 것은 따돌림을 받던 학생이 다른 지역으로 전학을 가도 사정은 쉽게 바뀌지 않는다는 점이다. 인터넷을 통해 ‘전학 간 ×××가 따였다’는 소문이 순식간에 돌기 때문이다.

▽‘사이버 왕따’ 대책이 나와야=왕따 현상에 대한 사회의 처벌이 엄격해지면서 육체적인 괴롭힘은 줄었다. 폭력을 행사하면 처벌을 받는 사실을 가해학생들이 잘 알고 있기 때문이다. 그 대신 교묘한 방법으로 괴롭힌다.

서울 D고의 한 학생은 “왕따 여학생이 화장실에 가면 ‘빨리 나오라’며 문을 두드리고 계속 따라다니는 등 신고를 해도 처벌하기 어려운 방법으로 왕따 학생을 괴롭힌다”고 말했다.

서울의 한 초등학교 6학년생들은 작년 3월 A 군의 안티카페를 만들어 A 군에 대한 비방 글을 많이 올릴수록 회원 등급을 올려준다는 조건까지 달았다.

서울시립청소년정보문화센터 강주현 상담팀장은 “10대 문화가 다양해진 것은 사실이지만 이기적이고 자기중심적인 경향은 더 강해졌다”며 “학교나 부모들이 사이버 공간 내의 왕따에 대해서도 적극적으로 대책을 세우는 것은 물론 교육을 통해 집단 괴롭힘이 얼마나 비겁하고 잔인한 행동인지 사전교육을 강화해야 한다”고 말했다.

왕따의 변화
아날로그 시대의 ‘왕따’구분디지털 시대 등장한 ‘왕따’
―따돌림 당하는 학생을 학급행사 축제 등에 끼워주지 않고 집단으로 괴롭힌다
―반 친구들끼리 대화에 끼워주지 않는다
주요사례―따돌림 당하는 학생의 ‘안티 카페’를 만들어 집단으로 괴롭힌다
―왕따 당하는 학생을 일부러 채팅에 초대해 놓고 말을 걸지 않는다
―돈이나 옷 학용품을 뺏는다갈취―도토리 알 등 사이버 머니를 뺏는다
―직접 때리거나 욕한다폭력―욕설이 담긴 문자, e메일을 보낸다
―학생들의 입을 통해 소문이 퍼진다소문―왕따 학생이 전학해도 학생들의 미니 홈피, 채팅 사이트를 통해 과거 따돌림을 당한 사실이 알려진다

▼특별취재팀(경제부)▼

이병기 기자(팀장) eye@donga.com

정위용 기자 viyonz@donga.com

홍석민 기자 smhong@donga.com

이정은 기자 lightee@donga.com

김상훈 기자 sanhkim@donga.com

김현수 기자 kimhs@donga.com

정임수 기자 imsoo@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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