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줌인]스캔들…돈…"기업 정보 내 손안에"

  • 입력 2003년 11월 27일 16시 35분


《SK글로벌 분식회계, 현대그룹 비자금 조성, LG홈쇼핑 압수수색….

재계에서 굵직굵직한 사건이 터지면 투자자들의 가슴은 철렁 내려앉는다. 살까말까 망설이다가 바로 엊그제 사들인 주식이, 여윳돈을 굴리기 위해 투자한 기업어음(CP)이 직격탄을 맞기도 한다.

특히 부실 징후가 없던 기업이 갑자기 문제를 일으켰다면 일반 투자자들로서는 ‘뒤통수 맞았다’는 느낌을 떨치기 어렵다.

그러나 예고는 있게 마련이다. 일반인들이 파악하기 어려운 ‘고급 정보’는 사채시장에서 소문으로 미리 돈다. 이 정보는 바로 기업에 대한 ‘경계경보’이다.

전주(錢主)가 있고, 돈을 구하려는 기업들이 있는 곳. 그곳에서는 살아있는 정보가 오가고 기업이 다시 평가된다. 사채업자들이 정보를 수집하고 유통하는 경로를 추적해 본다.》

● 비상식적 행위는 경계 경보

월드컵 열기가 채 식기 전인 지난해 7월 말 코오롱TNS가 부도났다. 코오롱TNS는 월드컵 공식휘장사업체 TNS월드의 모기업이라 부도는 의외의 소식이었다. 그러나 사채업자들은 그리 놀라지 않았다. 이 회사 소문은 이미 연초부터 나돌았기 때문.

당시 사채시장에는 이 회사에 납품하는 중소기업들이 물품대금으로 받은 진성어음뿐만 아니라 기업어음을 포함한 융통어음까지 할인의뢰를 잇따라 해왔다. 어음을 할인하러온 납품업체들은 여기서 TNS월드가 중복계약을 했다는 사실을 알게 됐고 집단 소송을 준비했다. 이 소식들은 빠르게 번져 곧바로 코오롱TNS 어음의 거래가 중단됐다.

사채업자 A씨는 “지방의 한 저축은행에서 지난해 5월 코오롱TNS의 어음 20억원을 결제할지 문의해왔는데 적극 말렸다”며 “이 은행장은 나중에 깊은 감사를 표시했다”고 말했다.

이 시장에도 ‘상식적 거래관행’이 있다. 사채업자 B씨는 “도저히 납득되지 않는 상황이 벌어지면 문제가 있는 기업”이라고 전했다.

얼마 전 정체불명의 여인이 한 건설회사의 어음 40억원어치를 들고 찾아왔다. 부산의 한 하청업체에서 왔다는 이 여인에게 사채업자들은 일제히 할인을 거부했다. 오후 5시가 넘은 시각에, 하청업체 직원도 아닌 여인이 거액의 어음을 돌리는 것은 납득이 가지 않았기 때문. 한 저축은행이 이 어음을 할인해줬는데 나중에 건설회사에서 “모르는 일”이라고 부인해 은행 실무진이 줄줄이 파면당했다.

이 건설업체 역시 신용도가 떨어졌다. 대형 어음을 소홀히 관리하는 기업치고 믿을 만한 기업이 없다는 게 이들의 설명이다.

● 여자 소문 뒤엔 반드시 문제 있다

기업에 대한 ‘경계경보’를 내리는 또 다른 정보는 기업 총수의 ‘여자관계’에 대한 것이다. 90년대 중반 부도가 난 한 건설업체나 최근 문제가 된 한 대기업의 경우 오랫동안 여자관계에 얽힌 소문이 돌았다.

사채업자 C씨는 “여자 문제는 언제든 생길 수 있다. 그러나 이를 깔끔하게 처리하느냐 못 하느냐는 최고 경영자의 능력과 관련된 일이다. 소문이 난다는 것은 경영자가 판단을 제대로 하지 못하고 있다는 증거로 볼 수 있다”고 말했다.

만일 상대 여자가 ‘아이를 낳았다’는 소문이 돌기 시작하면 이 시장에서는 보통 해당 회사의 어음을 취급하지 않는다.

최근 왕년의 톱탤런트와의 이혼으로 세간을 떠들썩하게 한 대기업도 사채시장의 평가가 좋은 편은 아니다. 사채시장에서 부부의 파경에 대한 소문은 벌써 1년여 전부터 돌았다. 문제의 주인공이 만일 ‘경영수업 중’이 아니라 경영을 책임지고 있었다면 기업 신뢰도가 더 크게 떨어졌을 것으로 보고 있다.

사채시장에 정보가 많은 것은 거액의 자금이 오가기 때문이다. 주식시장에서는 ‘조작’을 통해 이득을 챙기려는 세력에 의해 ‘좋은 정보’가 흘러 다니는 경우가 많지만 이 시장에서는 반대로 ‘나쁜 정보’가 많다. 기업 관계자의 입을 통해서도, 전주들을 통해서도 이 소문들은 나온다.

코스닥에 등록된 한 회사 관계자는 최근 어음 15억원을 할인하러 갔다가 “안 되면 1억원이라도…”라고 말을 꺼냈다가 오히려 신뢰만 잃었다. “이웃에게 돈을 빌려줄 때도 ‘안 되면 소액이라도’를 말하는 사람은 정말 자금사정이 급박한 경우”라고 C씨는 말했다.

은행의 업무처리 속도도 판단의 근거가 된다. 은행에 어음을 가져가 결제를 요구하면 업무전산화 덕분에 보통은 오후 2시, 늦어도 3시면 처리되게 마련이다. 그러나 은행 창구업무가 끝나는 4시가 지나도 결제가 되지 않는다면 그 기업에 이상이 있다는 신호다.

해당 기업을 직접 방문만 해봐도 정보를 얻을 수 있다.

입구의 화분이 말라 있으면 안 좋은 일이 생긴 경우가 많다. 생명을 다루는 일을 얼마나 잘 하고 있는가는 중요한 판단 기준. 자금담당 부장을 찾아도 직원들이 거들떠보지도 않는 경우가 있다. 이럴 땐 월급이 한두 달 밀렸거나 많은 직원들이 회사를 떠나 ‘파장 분위기’라는 게 사채업자들의 ‘경험칙’이다.

기업의 공시도 훌륭한 정보원이 된다. 빌딩 같은 고정자산을 팔기 시작하면 문제가 생겼다고 본다. 어떤 경우든 집을 내놓는다는 것은 ‘갈 데까지 갔다’고 보기 때문. 사채업자끼리는 경쟁관계라기보다는 공생관계다. 서로가 가진 정보를 교환하기 위해 ‘상조회’를 가동하기도 한다.

● 사채시장은 무엇인가

공인된 금융기관이 아닌, 개인간에 금전대여업이 이뤄지는 곳이다.

예전에는 은행의 본점이 있던 명동을 중심으로 형성됐지만 지금은 종로 을지로 퇴계로 충무로 강남으로 확산돼 있다. 하지만 중심은 여전히 명동이다.

일반 사업과 사채업을 겸업하고 있는 경우 ‘상사’ ‘무역’ ‘섬유’ ‘개발’ 등의 간판을 내걸며 더러는 ‘투자’ ‘컨설팅’ ‘캐피탈’ 등으로 돼있어 사채업자임이 분명한 곳도 있다.

전주와 중개업자가 구분되기도 하고 때로는 전주들이 직접 중개업에 나서기도 한다. 보통은 기업어음이 거래되지만 때에 따라 국공채나 비상장주식도 거래된다. 일반인을 대상으로 한 담보대출도 있다.

사채시장이라면 정치자금의 세탁장소, 고리대금업의 대명사라는 느낌이 강해 종사자들은 ‘사금융 시장’이라고 부른다. 정부에서는 대금업법을 통과시켜 이 시장의 양성화를 꾀하기도 했다. 은행 등 제도 금융권에서는 이미 사채시장에서 평가하는 기업의 금리를 대출시 주요 정보로 취급하고 있다.

하임숙기자 artemes@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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