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과 내일]김상영/2만달러 시대와 편 가르기

  • 입력 2003년 7월 8일 18시 25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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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출 100억달러, 1인당 소득 1000달러’ 구호가 온 나라를 뒤덮던 시절이 있었다. 박정희 전 대통령이 1972년 영구 독재체제인 10월 유신을 선포하면서 내놓은 비전이었다. 박 정권은 터져 나오는 민주화 열망을 경제발전으로 억누르기 위해 80년까지 목표를 달성하겠다며 모든 국가 역량을 집중시켰다.

72년은 1인당 소득이 319달러에 불과하던 때였다. 한 사람의 하루 생활비가 1달러에도 못 미치던 가난 때문에 박 정권의 구호는 국민에게 쉽게 먹혀들었다. 정치적 목적으로 급조됐던 이 목표는 77년 수출 100억달러를 돌파함으로써 앞당겨 달성됐다. 목표연도인 80년 1인당 국민소득은 1598달러가 됐다.

노무현 대통령이 ‘1인당 소득 2만달러 시대’를 국정목표로 제시했다. 그러나 구호가 갖고 있는 함의는 31년 전과는 질적으로 다르다.

2만달러 시대는 단순히 소득이 지금보다 두 배로 커진다는 것만을 의미하지 않는다. 세계은행에 따르면 작년 1인당 소득 2만달러를 넘은 나라는 27개국이다. 호주(29위)가 2만달러에 약간 못 미치고 프랑스(24위) 캐나다(23위) 독일(22위)이 2만2000달러 부근에 몰려 있다. 이탈리아와 스페인은 2만달러에 미달한다.

독일 프랑스 캐나다와 어깨를 나란히 하는 나라가 되려면 경제적 풍요 이상의 것이 필요하다. 사회적 갈등을 조정하는 능력, 소수에 대한 배려, 다른 의견에 대한 존중 등 의식수준 자체가 선진화되어야 한다. 하지만 우리 사회의 현실은 이와는 너무나 동떨어져 있다.

이룩한 성과를 지키기만 하면 되는 선진국과 달리 한국은 내부역량을 총동원해야 그들을 쫓아갈 수 있다. 따라서 사회통합 없이 도약은 불가능하다. 박 정권은 사회적 불만과 공평한 분배에 대한 욕구를 강압적으로 억누르면서 국가역량을 집중했지만 지금은 민주적 방식으로 국민적 에너지를 결집해야 한다.

하지만 요즘처럼 이해집단들이 조금도 손해 보거나 양보하지 않으려 한다면 2만달러 시대를 위한 새 판을 짜는 것은 절망적이다. 재계나 노동계 모두 이중잣대를 가지고 서로에게만 글로벌스탠더드를 요구하고 있다.

최근 노동운동이 활발해진 것은 소득 1만달러를 달성함으로써 나타나는 현상이라고 할 수 있다. 하지만 소득이 늘어남에 따라 노조에 대한 사회적 인내심도 줄어든다. 국제적인 시각을 갖추고 합리적으로 대응하지 않는 한 노조는 쇠락할 것이다.

재계도 다르지 않다. 철도노조 파업이 공권력에 의해 와해되자 전경련은 기회를 잡았다는 듯이 노조를 공격했다. 하지만 노동계에 요구한 글로벌스탠더드를 스스로에게 적용할 생각은 없는 듯하다. 기업의 글로벌스탠더드는 재벌을 개혁해 기업투명성을 높이라는 것이다.

소아병적 행태는 정부도 마찬가지다. 2만달러 시대를 국정 구호로 제시한 정부가 코드에 따라 적과 동지로 편 가르기를 한다면 국가 에너지를 결집할 수 없다.

70년대 한국형 경제발전 모델을 만들어냈던 우리는 이제 새로운 모델을 만들어야 할 시점에 섰다. 이 논의는 자식 세대에 어떤 나라를 물려줄 것인가 하는 장기 국가설계와 직결된다. 대의를 위해 조금씩 양보하겠다는 마음가짐이 없는 한 한국은 영원히 1만달러 주위를 맴도는 2류 국가로 남을지도 모른다.

김상영 논설위원 youngkim@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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