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야기해 봅시다]빙그레 정수용사장 vs 샘표 박진선사장

  • 입력 2002년 9월 8일 17시 49분


40년 가까운 우정을 증명이라도 하듯 빙그레 정수용 사장(왼쪽)과 샘표식품 박진선 사장의 대담은 흥겨운 분위기에서 진행됐다.
40년 가까운 우정을 증명이라도 하듯 빙그레 정수용 사장(왼쪽)과 샘표식품 박진선 사장의 대담은 흥겨운 분위기에서 진행됐다.
"그때가 중학교 1학년 때였지 아마…. 노래자랑 시간에 이 친구가 ‘맛을 보고 맛을 아는 샘표 간장’ CM송을 부르는 거예요. 누가 간장 회사 집 아들 아니랄까 봐.”(빙그레 정수용 사장)

“그때는 아는 노래가 그것밖에 없었다니까.”(샘표식품 박진선 사장)

경기중 1학년 때 이후 40년 가까이 우정을 이어온 정수용(鄭秀溶·52) 사장과 박진선(朴進善·52) 사장이 만났다. 이른 아침에 이뤄진 만남이었지만 ‘술이라도 한잔 걸친 듯’ 둘 사이의 대담은 막힘이 없었다.

오가는 반말과 떠들썩한 웃음 속에 최고경영자(CEO)로서의 고충, 식품업계에 부는 외적 내적 위기 등 무거운 주제들이 생동감을 찾기 시작했다.

“두 분 다 한국인이면 모르는 이가 없는 브랜드의 최고 경영자신데….”(기자)

“회사가 커지니까 그게 발목을 잡아요.”(이구동성으로)

특허청이 인정한 국내 최장수 상표인 ‘샘표’식품의 박 사장은 “샘표 하면 간장이 떠오를 정도여서 된장과 고추장을 아무리 잘 만들어도 잘 팔리지 않는다”면서 “마케팅쪽에서는 고추장 등에는 샘표 브랜드를 붙이지 말자는 의견까지 내놓는다”고 말문을 열었다. 샘표식품은 1946년 창사 이래 50여년 동안 간장 시장에서 1위를 해왔다.

아이스크림에서는 둘째 가라면 서러워할 만한 브랜드 파워를 가진 빙그레도 같은 난관에 부닥쳐 있다. 정사장은 “우리도 라면사업에서 철수 할지를 놓고 참 많은 고민을 했다”며 “아이스크림의 이미지가 강해 빙그레가 라면을 만들었다고 하면 고객이 낯설어한다”면서 박 사장의 말에 고개를 끄덕거렸다.

한 우물만 파기에는 국내 식품업계의 시장이 너무 좁다는 데서 이들의 고민은 출발했다. 시장은 포화 상태이고 성장하지 않으면 퇴보하는 게 기업의 생리인데….

박 사장은 “국내 식품업계는 안정적인 내수시장을 발판으로 꾸준히 성장했지만 극적인 성장은 없었다”면서 “산업이 늘 정체되니 젊은이에게 인기가 없고 인재를 모으기도 어렵다”고 고충을 털어 놓았다.

정수용사장

정 사장은 “설상가상으로 세계무역기구(WTO) 체제에서 외국산 수입식품과 경쟁해야 하는 시대가 되고 있다”면서 “앞으로 경쟁이 뜨거워지면 메이저 외에는 살아남기 어렵다”고 전망했다.

둘 다 전체 직장 생활에서 식품업계에 있던 세월이 짧은 ‘늦깎이’ 식품업체 CEO인 탓일까, 평이한 진단이지만 말에는 위기감이 배어 있다. 하지만 언제까지 위기 탓만을 하고 있을 수는 없는 일.

기자와 산업연구원(KIET) 연구원을 거쳐 42세이던 92년에야 빙그레에 안착한 정 사장은 “아이스크림 등 유가공 사업만으로 기존 시장의 한계를 넘어설 수 없다”면서 “인수합병 등을 통해서 관련 있는 분야로 사업을 확장할 생각”이라고 말했다.

그는 입사 8년 만(2000년)에 최고 경영자가 됐고 그 뒤 과감한 구조조정과 신제품 개발로 유가공업계에서 최고 성장률을 이끌어냈다.

박진선사장

박 사장은 새로운 시장을 개척하는 실험을 하고 있다. 그는 “우리 맛을 백인 중산층이 어떻게 받아들일지 궁금해 지난해 로스앤젤레스 백인 거주지역에 한국 전통 음식점 2개를 열었다”면서 “반응이 무척 좋았고 앞으로 모두 500곳에 만들 계획”이라고 말했다.

비록 창업주의 맏손자지만 박 사장은 경영에 뜻이 없었다. 집안의 반대를 무릅쓰고 철학을 전공했고 미국에서 철학 교수를 하다 90년에야 샘표식품에 입사해 97년 사장이 됐다.

그는 “한국이라는 좁은 시장에 안주해 우리 맛을 세계화하려는 노력을 하지 않았다”면서 “간장 된장 고추장 등 전통 소스를 외국 사람에게 맛보이는 데 다른 식품업계들도 많이 참여하면 좋겠다”고 말했다.

“세계에서 가장 다양한 발효 음식을 가진 우리 음식문화의 강점을 잘 활용하면 세계에서도 충분한 경쟁력을 가질 수 있다”는 박 사장의 말에 정 사장 역시 “발효음식은 한번 맛을 들이면 반드시 다시 찾는 ‘중독성’이 강하다”고 맞장구를 쳤다.

그렇다면 조직 내부의 힘을 어떻게 이끌어내야 하는가. 계획이 아무리 훌륭해도 결국 손발이 따라주지 않으면 공염불일 따름. 두 사람 모두 “조직이 하나로 뭉쳐 활기차게 일하게 하려면 조직원이 공유하는 장기 비전이 있어야 한다”는 데 인식을 함께 했다.

박 사장은 “비전은 반드시 내부합의를 거쳐 나와야 한다”면서 “특히 오너가 사장일수록 사원들이 공감할 수 있는 비전을 제시하는 것이 중요하다”고 말했다.

정 사장 역시 “조직이란 게 결국 사람들의 집합인데 사람의 사기를 북돋는 일이 핵심”이라면서 “서두르지 말고 차근차근 논의를 모아야 한다”고 강조했다.

말로만 외치는 비전, 실천이 없는 비전은 결국 조직에 패배감만 가중시킨다는 것을 그들은 피부로 느끼고 있었다.

헤어지는 자리에서 박 사장에게 물어봤다.

“사장을 하지 않으시려다, 해보시니 어때요.”(기자)

“‘갈 길은 멀고 할 일은 많다’는 말 밖에 떠오르지 않네요.”(박 사장)

“50년 동안 잠자던 샘표를 사장이 된 지 5년 만에 50% 이상 키워 놓고도 그런 소리를 하냐.”(정 사장)

이들 식품업체 엘리트 CEO 두 사람은 한국 식품업계의 자존심을 함께 지키기 위해 수십년 전부터 운명적으로 인연을 맺은 듯했다.

이헌진기자 mungchii@donga.com 김창원기자 changkim@donga.com

◆약력=정수용 사장은 △1950년 충북 충주시 출생 △경기고 졸업, 서울대 경제학과 졸업 △75∼80년 합동통신(현 연합뉴 스) 외신·사회부 기자 △81∼86년 산업연구원(KIET) 연구원 △90년 일본 히도쓰바시대 경제 학부 석사 및 박사과정 수료 △90∼92년 한양유통 유통경제 연구소 근무 △92년 빙그레 입사 △2000년 빙그레 사장

박진선 사장은 △1950년 서울 출생 △경기고, 서울대 전자공학과 졸업 △79년 미국 스탠퍼드대 전자 공학 석사 △86년 미국 빌라노바대 철학과 강사 △88년 미국 오하이오 주립대 철학박사 △90년 샘표식품 기획이사 △97년 샘표식품 사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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