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EO칼럼]정진욱/´독서영웅´ 피보를 기다리며

  • 입력 2002년 5월 31일 18시 40분


한 사람이 책을 읽는다. 그는 책 읽을 시간을 벌려고 약속도 거의 하지 않는다. 읽는 책마다 메모와 단상을 적어가며 한 주에 6권, 때로는 20권 이상을 꼼꼼히 읽는다. 금요일 밤이면 그 책들의 저자 여섯 명을 불러서 토론을 하고 책을 소개한다. 그가 소개한 책은 다음날이면 곧바로 다 팔린다.

프랑스2TV의 독서프로그램 ‘문화의 용광로’ 진행자였던 베르나르 피보가 바로 그 사람이다. 27년 동안 변함없이 보여준 성실성과 지적 탁월함 덕분에 그는 프랑스 출판계의 진정한 ‘문화권력’이었다.

유럽 TV에서 독서프로그램은 오랜 전통이다. 독일에서 ‘문학 사중주’라는 문학방송으로 유명한 마르셀 라이히 라니츠키가 방송을 통해 책을 다룬 것은 64년부터고, 피보의 프로그램은 75년에 시작됐다.

우리나라는 어떤가. 요즘만 본다면 유럽이 부럽지 않다. 지난해부터 TV와 라디오마다 책읽기 프로그램을 내보내고 있다. 신문이 독립적인 책 섹션을 만들어 독서붐의 바탕을 마련한 건 더 오래된 일이다. 정부는 출판산업 육성안을 내놓았고 서점의 신용카드 수수료도 내려줄 생각이다. ‘책 읽는 사회 만들기 국민운동’도 벌어지고 메트로 북메세(지하철 책열차)가 달린다.

다들 우리 사회 전반에 ‘출판 독서 르네상스’가 도래했다고 한다. 인터넷서점을 운영하고 있는 필자로선 물류 창고에 산더미처럼 쌓였던 책들이 하룻밤만에 사라지는 광경이 경이롭다.

그때마다 궁금해진다. 그 많던 책을 누가 다 읽는 것일까?

이번 독서붐의 견인차가 이른바 386세대라는 데는 별다른 이견이 없다. 386세대들은 80년대 대학시절에 책을 마음의 양식이 아닌 ‘오늘 바로 일용할 실천의 양식’으로 만났다. 둘만 모이면 책을 읽고 토론을 했다. 그들이 90년대의 방황을 끝내고 사회의 중추가 되면서 책을 사고, 또 만들어 내고 있는 것이다. 가령 MBC TV ‘느낌표’의 PD도 386이고 신문 서평란을 독립시킨 주역 기자들도 대부분 386들이다.

어린이 책의 유례 없는 호황도 마찬가지 이유로 설명된다. 386들은 어린 자녀들에게 부지런히 책을 건네주면서 자신들이 책과 만났던 강렬한 체험과 책에 대한 숭배를 물려주고 있는 것이다.

그렇다면 현재의 독서붐은 계속될 것인가. 답은 ‘386 이후’에 있다. 386에 이어 책 읽는 인구가 지속적으로 재생산돼야 지금의 르네상스는 다음 단계를 꽃 피우기 위한 싹이 될 수 있다.

그러나 대학생을 포함해 20대 이하의 청소년은 책보다는 TV와 PC가 친숙한 영상세대다. 관건은 이들을 새로운 독서인구로 유입시키는 것이다. 하지만 우리 사회나 교육과정은 그럴만한 환경을 제공하지 못한다. 중학생만 되면 시험에 짓눌려 즐거운 독서는 끝이다. 성공한 독서인의 이야기가 사회적 교육적 자산으로 축적돼 있지도 못하다.

제대로 된 독서인은 ‘즐거운 독서’를 해본 경험을 통해 길러진다. 그런 점에서 우리에게서도 성공한 ‘책읽기의 영웅’이 나와야 할 때인지 모른다. 자신의 독서일기를 5권이나 펴낸 작가 장정일처럼 빼어난 독서가도 적지는 않다. 그러나 ‘피보의 권력’을 만들어줄 만큼 책을 사랑하는 독자들이 없다면 ‘한국의 피보’도 나올 수 없다. 장정일은 어느 글에선가 “돈을 조금이라도 아껴 책을 사려고 머리를 짧게 깎는다”고 했다던가.

정진욱 인터넷 서점 모닝365 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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