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듀2000 새희망2001]"1만원 쓰기도 부담스러워요"

  • 입력 2000년 12월 19일 19시 28분


<<올 연말은 유난히 썰렁하다. 새천년의 시작을 알린 화려한 불꽃은 오히려 짙은 그림자만 남겼다. “외환위기의 긴 터널을 벗어났다”면서 허리띠를 풀었기 때문인지 이처럼 후회스럽게 세밑을 느낀 기억이 없다. 그러나 새해마저 맥없이 맞을 수는 없다. 각 경제현장을 지켜온 당사자들의 체험담을 통해 올 한해를 돌아보고 새해 희망을 정리한다.>>

여기저기서 힘들다는 말이 들려서일까. 연말이 다가올수록 주부 김인자씨(38·경기 용인시 수지읍)의 마음은 왠지 춥기만 하다.

“올 송년회는 조촐하게 가족들끼리 집에서 저녁이나 먹으려고 해요. 나라 경제도 어렵다고 하고 내년엔 또 어떻게 될지도 모르고….”

아이들 크리스마스 선물 사주라고 친척들이 보내준 돈도 5만원만 쓰고 저축해야겠다며 김씨는 겸연쩍게 웃었다.

그의 남편은 엔지니어 출신으로 대기업의 부장. 이것저것 다 떼고 연간 3000만원 정도 벌어오는 돈으로 부모님 용돈 드리고 유진(11) 동훈(5) 두 아이를 키우는 빠듯한 살림이다. 그렇지만 외환위기의 혹한에도 별 탈 없이 살아왔다. 남편을 믿으니까 큰 걱정을 안했다. 올봄에만 해도 위기를 잘 넘겼다 싶어 안도하고 있었다. 그게 화근이었나 보다.

5월에 시어머니가 미국 큰형님 댁에 가신다기에 큰아이를 같이 보내서 한달 간 음악캠프에 다니게 했다. 어학연수도 하고 유진이가 좋아하는 바이올린 연주도 할 수 있도록 하기 위해서다. 비행기삯과 선물값만 200만원. 그 돈이면 지금 둘째가 졸라대는 수영강습이나 운동도 맘놓고 시킬 수 있으련만. “이제 한숨 돌렸다”고 안심한 것이 탈이었다. 아이들 눈높이만 높여 놓고 그만큼 해줄 수 없으리라 생각하니 마음이 아프다는 김씨.

여름부터였다. 큰 회사들까지 펑펑 쓰러지는 것을 보고 불안한 마음이 든 것은. 남편 회사에서도 조직 개편이 있고 일부 명예퇴직하는 사람들이 있다는 얘기를 들었다. 당장 학교에서 한달에 3만원 들여 해온 큰아이의 바이올린 레슨부터 끊었다.

자칫 남편의 심기를 건드릴까봐 “당신은 어떠냐”고 묻지도 못했다. 지금 생각하면 아무 일 없이 가을이 지난 것만도 다행이다.

남편이 아무리 열심이라 한들 회사가 쓰러진다면 어찌해볼 도리가 없지 않은가. 남편도 이젠 40줄을 훌쩍 넘었는데 모아 놓은 재산은 33평형 아파트 한 채가 고작. 세 식구가 남편만 바라보고 사는데 무슨 일이라도 있으면 어쩌나. “이런 저런 생각을 하면 1만원을 쓰기도 부담스럽다”며 김씨는 가는 숨을 내쉬었다.

겨울 들어서는 둘째아이도 유치원을 제외하고는 학원을 그만두게 했다. 미래가 불확실할 때는 한푼이라도 절약해야 한다는 생각에서다.

어둠이 깔리는 겨울 저녁, 곰곰이 가계부를 들여다본 김씨는 그래도 생활비가 작년보다 훨씬 늘어난 것을 깨닫고 놀랐다. 자동차 유지비가 작년 말엔 한달에 35만원이었는데 지난달에는 45만원이나 됐다. 아파트관리비 등 주거비도 22만원에서 25만원으로 늘었다. 줄어든 것은 아이들 교육비와 문화비 정도. 날이 다시 따뜻해지면 부업 자리라도 알아봐야겠다고 김씨는 다짐했다.

“내년 하반기쯤엔 경기가 풀리겠죠? 올해 안에 구조조정도 대충 틀 짓는다는데.”

답하기 어려운 질문을 해놓고 김씨는 스스로 답을 내놓았다.

“내년엔 나아질 거예요. 네 식구 모두 건강하고 아이들 아빠가 성실하니까. 열심히 살아야죠.”

<신연수기자>ysshin@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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