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대 '이단아' 박종섭 사장 "그 누가와도 안되는 건 안돼"

  • 입력 2000년 9월 4일 18시 55분


김재수(金在洙)현대 구조본부장은 최근 현대전자측에 "그룹이 외부에 컨설팅을 받아야 하니 현대전자측에서 일부 비용을 부담해달라"고 요구했다가 머쓱해졌다. 현대전자 박종섭(朴鍾燮) 사장이 김 본부장의 부탁을 일언지하에 거절한 것. 김본부장은 8월 현대건설이 유동성 위기를 겪을 때 박사장에게 "현대전자에서 건설의 기업어음(CP) 1000억원어치를 매입해달라"고 부탁했다가 역시 거절당했다.

그룹 구조본부장의 부탁은 사실상 그룹 회장의 지시에 가깝다. 전문 경영인이 이를 거부한 것은 극히 이례적인 일. 최근 박사장의 이런 행동 때문에 현대그룹내에서는 말들이 많다.

"모기업이 어렵다고 도와 달라는데 이럴 수 있냐"며 섭섭한 감정을 드러낸 사람은 차라리 온건한 편이다. "언제 한번 손을 봐야 한다"는 강경론자도 심심치않게 만날 수 있다.

이익치(李益治) 전 현대증권 회장의 측근들도 7월 현대중공업과 그룹간에 지급보증문제를 둘러싸고 법적분쟁이 벌어질 때 박종섭(朴宗燮·53)사장이 전자의 이익만을 지킨 것에 대해 "박사장은 현대 식구가 아니다"며 강력하게 비난했다. 박사장이 이렇다보니 그룹측에서 부탁할 일이 있으면 박사장 밑의 임원에게 전화를 하고 박사장의 성격을 잘 아는 임원은 뒤탈이 무서워 전화를 피해 도망다니는 웃지못할 일도 벌어지곤 한다.

내부의 이런 평가와 달리 박사장은 국내외 투자자들로부터는 '독립경영과 투명경영을 실천하는 CEO'로 평가를 받고 있다. 미국계 증권사인 살로먼스미스바니는 최근 현대전자 관련 리포트를 내고 "박사장이 취임한이후 사외이사(4명)를 사내이사(3명)보다 많이 임명하는등 지배구조를 개선하고 투명한 경영을 하고있다"며 박사장을 극찬했다.

투자자들은 또 현대전자가 금년 상반기 영업이익을 6200억원을 기록했음에도 불구하고 전자가 보유한 현대투신주식의 평가손 2500억원과 장기 재고에 따른 평가손 3600억원을 회계에 반영하는 등 치부를 스스로 공개한 것을 높이 평가했다.

4월 박사장이 취임한 이후 현대전자의 기업문화도 보수적으로 유명한 다른 현대계열사와 차별화되고 있다.

현대전자는 7월부터 복장 자율화를 전격 시행했고 대졸사원급 이상으로 연봉제를 확대하는등 연공서열에 구애받지않는 성과중심 평가제를 실시하고 있다. 박사장은 또 사원들을 대상으로 경영설명회를 열고 자신이 직접 회사의 내부사정을 투명하게 공개, 사원들에게 깊은 인상을 심어주었다.

재계에서는 박사장의 경영스타일에 대해 미국에서 경영학 박사를 땄고 미 맥스터사의 회장을 겸직하는 등 미국식 경영에 익숙하기 때문에 가능하다 고 풀이한다.

현대전자의 한 임원은 이와관련 "박사장의 개인적인 소신도 작용하고 있지만 현대전자의 외국인 지분이 43%에 달해 과거처럼 계열사 지원을 함부로 했다가는 기업이 하루아침에 망할 수 밖에 없는 기업환경의 변화도 무시할 수 없다"고 말했다.

▼박종섭 사장 경력▼

67년 연세대 경영학과

75년 시티은행 차장.

79년 전경련 차장.

82년 미 시카고대학 경영학 석사.

83년 현대전자산업 입사.

90년 미국 노바대학 경영학박사.

93년 현대전자 기획실장 반도체영업본부장.

95년 미 맥스터사(현대전자투자법인)사장.

96년 미국 맥스터사 회장.

2000년4월 현대전자 대표이사 사장.

<이병기기자>eye@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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