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석유시장 파헤친다/판치는 덤핑]'뒷거래' 곳곳 탈세

  • 입력 2000년 6월 28일 18시 52분


“사장님, 오늘은 SK가 1만2000원으로 가장 쌉니다.”

부산 사상구에서 한 정유사의 폴주유소를 운영하는 H씨가 최근 석유제품 일반판매상(부판) K씨로부터 받았던 전화 내용이다. K씨는 매일 오전 10시경 정유4사가 내는 덤핑유의 시세를 알려준다.

이 시세대로 경유 등유 등을 공장도가보다 드럼(200ℓ)당 1만2000원 싸게 살 수 있다면 소비자에겐 ℓ당 60원까지 싸게 팔 수 있는 셈.

국내 석유시장에서 덤핑이 판을 치고 있다. 이는 ‘담합’ ‘터무니없는 원가책정’ 등과 함께 국내 석유시장의 3대 고질(痼疾) 중 하나다.

특히 덤핑은 일부 판매업자들이 부당이익을 누리는 가운데 건전한 주유소업자들의 몰락을 부추기고 그 과정에서 ‘가짜 석유제품’의 유통과 ‘탈세’의 횡행을 불러와 결과적으로 소비자에게 피해를 주는 구조악(構造惡). 이 모든 문제의 출발점이 덤핑 물량을 시장에 내놓은 정유사에 있음은 두말할 필요도 없다.

본보 취재팀이 입수한 수도권 부산 대구 전북지역의 덤핑유 시세표는 덤핑유의 전국적 유통 실태를 극명하게 보여준다.

▽덤핑유의 유통구조〓석유제품은 ‘정유사→대리점→주유소(또는 일반 판매업자)’, 또는 ‘정유사→주유소’의 경로로 판매되는 게 정상이다. 그러나 소매업만 허용된 일반판매업자가 정유사와의 직거래로 싼값에 물량을 확보, 수평거래를 금지한 법을 어기고 주유소나 소형 판매업자 등에 팔아넘기는 과정에서 덤핑이 이뤄진다.

덤핑유는 당연히 ‘공장도가보다 훨씬 싼 값’에 판매되고, 정유사는 이 과정에서 과잉물량을 해소한다. 최근 한 정유사에서 퇴직한 K씨는 “덤핑거래는 현금으로 이뤄지기 때문에 현금회전율이 높다”며 “정유사는 손해보지 않는 게 덤핑”이라고 말했다.

국내의 덤핑유 물량에 대해 석유업계는 “등유의 경우 국내 소비량의 50%, 경유는 20% 가량 덤핑으로 충당된다”고 입을 모은다. 지난해부터는 차량용 경유와 무연휘발유로까지 범위가 넓어졌다는 것.

정유사가 직접 공급하는 항공사, 기업체 등 대형거래처간에도 ‘사실상의 덤핑’이 이뤄진다. 연간 수백억원대의 벙커C유를 도입하는 한 제철소의 구매담당자는 “공장도가보다 월등히 싼 ‘국제시가’에 약간의 부대비용을 붙인 가격으로 공급받는다”고 귀띔했다.

이와 관련, 한 정유사 관계자는 “공급초과시장에서 고정비 일부라도 회수하기 위해 싱가포르 시장가 기준으로 납품한다”며 “정유사로서도 꼭 손해라고 볼 수는 없다”고 자인했다.

▽복잡한 가격구조〓덤핑은 석유제품의 가격구조를 복잡하게 만든다. 물량에 따라, 또 정유사(또는 대리점)와 주유소간의 계약 형태에 따라 가격차가 크기 때문.

서울 관악구에 주유소를 가진 K씨는 “어떤 주유소는 세후(稅後) 공장도가격이 정상가보다 ℓ당 200원이나 싼 덤핑유를 받는가 하면 어떤 주유소는 정상가보다 오히려 높은 가격에 받기도 한다”고 말했다. 정유사에 빚을 진 주유소는 이렇게 덤핑유를 정상가격보다 높게 받더라도 불평하지 못한다는 것.

이처럼 공급가격이 다르다보니 주유소간 경쟁도 치열할 수밖에 없다. 경기 군포시의 한 주유소 사장은 “‘가격파괴’ 주유소는 덤핑유를 받았다고 봐도 큰 무리가 없다”고 말했다.

▽덤핑은 탈세의 원인〓덤핑 과정에서 탈세가 이뤄지는 것은 어쩌면 당연한 결과다. 정상 유통이라면 단계별로 세금계산서가 발부되고 부가가치세도 신고돼야 하지만 불법 유통과정은 현금거래에다 근거자료도 없기 때문에 ‘탈세의 온상’이 되는 것.

지난해 국세청은 6개의 부판업체를 조사해 1278억원의 탈루 세금을 적발했다. 당시 부판업체들은 확보한 물량을 주유소 등에 무자료로 넘기고 대신 기업체 등에 허위 세금계산서를 발부해 또다시 수수료를 챙기는 수법을 썼던 것으로 확인됐다.

이 과정에는 품질검사가 전무하기 때문에 일부 악덕 부판업자들은 폭발위험이 있는 시너나 벤젠을 섞은 가짜 휘발유를 제조, 유통시키기도 하는 것으로 알려졌다.

현재 국내의 부판업자는 200∼260명선. 이들의 탈루 세금은 연간 수천억∼수조원대에 이를 것으로 석유업계는 추정한다.

▽대책〓덤핑을 근본적으로 뿌리뽑기 위해서는 현행 공급자 중심의 석유시장을 소비자 중심으로 개편하는 게 핵심이라고 전문가들은 지적한다.

문제는 시장주도권을 가진 정유사들의 ‘자발적 참여’를 기대하기 어렵다는 것. 정유4사는 지난해말부터 사장단 자정결의 등을 통해 수차례 불법 유통질서 개선을 공약해 왔으나 아무 것도 달라진 것이 없다.

이처럼 ‘말 다르고 행실 다른’ 적폐(積弊)를 해소하기 위해서는 특단의 대책이 필요할 뿐이다. 한 전문가는 이와 관련, “유통질서를 관리 감독해야 할 산업자원부는 ‘책임방기’로 일관해 왔다”며 “더이상 고양이에게 생선가게를 맡기지 말고 국세청과 공정거래위가 대책을 마련해야 할 것”이라고 주문했다. 이와 함께 거래과정의 투명성을 높이기 위해 석유공급자와 수요자가 직거래하는 ‘현물시장’이나 ‘전자상거래제’를 도입하는 것도 한 방법이 될 수 있다고 석유업계는 보고 있다.

<기획취재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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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창희차장(팀장)insight@donga.com 이진녕차장 jinnyong@donga.com 하종대기자 orionha@donga.com

허문명기자 angelhuh@donga.com 나성엽기자 internet@donga.com

이헌진기자 mungchii@donga.com 이승헌기자 ddr@donga.com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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