鄭泰守(정태수)한보그룹총회장이 95년 11월 한보철강 시설자금으로 2천5백억원을 대출받으면서 제일은행에 자기자금조달 계획서를 냈다.
「①서울 개포동과 장지동 부지 매각 ②유상증자 단행 ③전환사채 발행」.
그러나 정회장의 자금조달 계획은 끝까지 「계획」에 그치고 만다.
우선 팔겠다고 제시한 부동산은 이미 은행에 담보로 잡혀있거나 성업공사에 매각의뢰된 물건들. 담보로 잡힌 땅의 매각대금은 자기자본이 될 수 없다는 것은 상식. 문제의 부동산은 지금까지도 유찰돼 팔리지 않은 상태다.
96∼99년중 3천억원의 유상증자를 실시, 자본금에 전입한다는 계획은 95년 적자로 돌아서면서 자연스럽게 무산됐다.
계획대로라면 정회장은 1천4백62억원의 전환사채를 발행했어야 했다. 그러나 발행된 물량은 고작 1백8억원어치.
정회장은 결국 수천억원을 자체적으로 조달하겠다고 호언했으나 실제 조성한 자금은 1백여억원에 불과했다. 실속없는 계획서만 덜렁 내고 은행돈 2천5백억원을 자기 금고에서 꺼내듯 손쉽게 빼낸 것이다.
재벌그룹은 은행돈을 어떻게 생각할까. 은행 관계자가 전하는 A그룹의 투자결정과정을 보자. 『경쟁 그룹이 얼마전 새로 진출한 사업에서 큰 돈을 벌고 있는 것 같습니다. 우리도 늦기 전에 뛰어들어야 합니다. 이달말까지 사업계획을 짜세요』(오너)
이 자리에는 당연히 동석해야 할 자금담당 임원이 없었다. 사업과 돈은 불가분의 관계인데도 자금사정은 고려되지 않은 것. 자금담당 임원에게는 무조건 자금조달 계획을 세우라는 지시가 떨어졌을 뿐이다. 10대그룹에 속하는 B그룹의 한 임원은 은행이 싼 자금을 빌려주면 어떻게 활용하겠느냐는 질문에 『불황이니 신규투자는 힘들겠고…, 부동산에 투자하는 게 가장 수지맞겠지』라고 거침없이 말했다.
우리 기업들의 헛배부른 차입경영, 남의 돈으로 문어발식 사업확장에 질주하는 빚더미 경영은 이제 한계에 달했다.
최근에 쓰러졌거나 제대로 된 시장경제 아래서는 발상도 못할 「부도방지협약」이라는 인공호흡기에 매달려 연명하는 재벌그룹들은 하나같이 차입에 의존해 기업을 꾸려왔다. 이들은 불황을 탓하지만 자금회전이 어려울 때 불어나는 이자부담을 감당할 수있는지를 면밀히 따져보지 않은 자기 책임이 더 크다는 것이 금융전문가들의 지적이다.
부도방지협약의 첫 시혜자인 진로그룹의 차입실태를 보자. 금융비용 부담률은 23%. 1백억원을 벌어 23억원을 은행빚 갚는데 썼다는 얘기다. 진로는 특히 금융권 빚 1조2천억원 가운데 3분의 2 이상을 종합금융사 할부금융사 등 제2금융권에서 꾸었다. 제2금융권 차입이 절반을 넘으면 일단 위험하다고 봐야한다는 것이 한국은행 한 간부의 말이다.
투자원본 회수에 오랜 시간이 걸리는 사업에 3∼9개월짜리 단기자금을 마구 끌어 썼으니 재무구조가 나빠질 수밖에 없다. 진로에 이어 두번째로 19일 부도방지협약에 매달린 대농그룹의 재무구조는 더욱 기형적이다. 계열 전체로 볼 때 작년 한햇동안 벌어들인 이익은 전혀 없다. 오히려 3천22억원의 당기순손실을 기록했다. 그 53%인 1천6백억원이 연간 지출이자다. C은행 여신담당부장은 『투자의 ABC도 모르는 사람들이 경영을 했다』고까지 혹평했다.
최근 공정거래위원회가 발표한 30대 재벌의 작년말 현재 평균 자기자본비율은 18.2%, 부채비율은 449%로 95년에 비해 훨씬 악화됐다.
부채비율만 따질 때 국내 30대 재벌은 미국제조업(160%)의 2.8배, 대만제조업(85.7%)의 5.2배.
주요 그룹이 지난해 지출한 금융비용은 △현대 2조2천5백70억원 △삼성 1조8천6백억원 △LG 1조5천5백억원 △대우 1조8천7백억원 △선경 1조3천3백억원.
『과거 인플레이션이 심하고 개발이 최우선이던 시절에 외부차입금으로 재미를 보던 재벌들이 아직도 그때 버릇을 버리지 못했다. 그때는 차입금으로 떼돈을 벌었는지는 모르지만 지금은 빚이 많으면 회사문을 닫을 수밖에 없다』(彭東俊·팽동준 한은 조사2부장)
국내 기업들의 경기대응력이 떨어지는 것도 차입경영의 비극이다. 불황기에 밑질 것 같으면 생산을 줄이면 된다. 그러나 눈덩이처럼 불어나는 금융비용 부담 때문에 생산설비를 놀릴 수 없는 게 우리 기업의 딜레머다. 탄력적인 생산조정이 안되는 것. 경제전문가들은 『외형성장과 사세(社勢)를 동일시하는 재벌들이 거의 모든 산업에서 무분별한 중복투자로 일관, 전체적으로 국가경쟁력이 크게 약화됐다』고 지적한다.
한보 삼미그룹의 부도는 차입경영의 파국을 잘 보여준 사례다. 「불황이 좀더 길어지면 살아남을 재벌이 과연 몇개나 될까」. 기업들 스스로 자문하기에 이르렀다.
〈이강운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