썩어가는 과정 또한 작품…미술관 역할 되묻는 ‘소멸의 시학’

  • 동아일보
  • 입력 2026년 2월 9일 16시 59분


국립현대미술관 기획전 ‘소멸의 시학: 삭는 미술에 대하여’

최근 서울 종로구에 있는 국립현대미술관 서울관 정원에 들러 봤다면, 곳곳에서 ‘초(草)사람’이란 작품을 마주할 수 있다. 고사리 작가가 미술관 내 잡초를 베어 눈사람 모양으로 뭉친 것. 앙증맞은 모양새가 행인의 시선을 잡아끌지만 우려도 든다. 녹지야 않겠지만, 겨우내 볕과 바람에 삭을 이 작품을 미술관은 어떻게 소장할 수 있을까.

끝내 분해되고 소멸하는 작품 50여 점을 선보이는 국립현대미술관 기획전 ‘소멸의 시학: 삭는 미술에 대하여’가 지난달 30일 개막했다. 이른바 ‘불후(不朽·썩지 아니함)의 명작’을 보관하고 그 가치를 유지하려 애쓰는 미술관의 역할에 대해 질문을 던지는 전시다. 이주연 미술관 학예연구사는 “우리말 ‘삭다’는 발효돼 맛이 든다는 의미도 내포하고 있다”며 “썩는다는 부정적 뉘앙스를 넘어 작품을 관람할 수 있길 바란다”고 했다.

● 썩어가는 과정 또한 작품

전시장에 들어서면, 먼저 텁텁하고도 푸릇한 흙 내음이 코끝을 스친다. 관람객은 발이 부드럽게 푹푹 빠지는 토양을 밟아야 다음 전시장으로 넘어갈 수 있다. 미국 작가 아사드 라자가 서울에서 구한 폐기물로 만든 작품 ‘흡수’다. 커피 찌꺼기와 닭 뼈, 택배 상자, 전선 피복 등 오늘날 서울이란 도시가 담긴 폐기물들이 분해 과정을 거쳐 비옥한 흙으로 재생됐다. 관람객은 누구나 이 흙을 한 줌씩 가져갈 수 있다. 전시가 끝나도 작품은 집집마다 다양한 형태로 소장되는 셈이다.

국립현대미술관 ‘소멸의 시학’전에 전시된 아사드 라자의 ‘흡수’. 서울에서 나온 폐기물로 토양을 만들었다. 분해와 소멸에 내재된 공동체성을 강조한 작품으로, 관람객은 이 흙을 조금씩 집에 가져갈 수 있다. 뉴시스
국립현대미술관 ‘소멸의 시학’전에 전시된 아사드 라자의 ‘흡수’. 서울에서 나온 폐기물로 토양을 만들었다. 분해와 소멸에 내재된 공동체성을 강조한 작품으로, 관람객은 이 흙을 조금씩 집에 가져갈 수 있다. 뉴시스
사물이 부패하는 과정도 이번 전시에선 그 자체로 작품이 된다. 일본 작가 유코 모리의 ‘분해’는 시간이 흐르면서 과일이 익고 부패하는 과정을 시청각적으로 표현했다. 선반에 놓인 과일에 꽂힌 전극이 변화하는 수분량을 측정하고, 이에 따라 과일과 연결된 조명의 세기와 깜박임, 스피커에서 나오는 소리의 높낮이 등이 바뀐다.

독일 베를린에서 활동하는 댄 리의 ‘목격자’ 역시 세월을 품었다. 2022년부터 세계 각지에서 전시되는 동안, 하얗던 직물은 누르스름하게 빛이 바랬다. 도자기에 담긴 액체는 발효돼 쿰쿰한 냄새마저 풍긴다. 작가는 앞서 “2026년이 지나면 이 작품을 보관하지 않겠다”고 밝혔다고 한다. 곰팡이를 동반한 이 작품을 누군가 구매하지 않으면, 작품은 흙으로 돌아가거나 재료로 재사용될 운명이다. 어쩌면 전시를 찾은 관람객들은 이 작품의 마지막 ‘목격자’가 될 가능성도 있다.

● 미술관은 작품의 ‘보호자’


과테말라 출신 작가 에드가 칼렐의 ‘고대 지식 형태의 메아리’는 미술관이 무엇을 위한 장소인가에 대해 날카로운 질문을 던진다. 전시장 넓게 포진한 이 작품은 돌 30여 개를 제단 삼아 과일과 채소를 올려뒀다. 제물은 모형이 아닌 진짜이기에 점차 삭고, 일정 시간이 지나면 교체된다. 고대 마야 문명에 뿌리를 둔 모국의 칵치켈 부족이 땅과 조상에 대한 감사의 마음을 담아 올리는 제의 풍습에서 착안했다고 한다.

흥미로운 건 이 작품이 보관되는 방식이다. 보관 책임자인 영국 테이트 미술관은 2023년 이 작품의 ‘소유자’가 아닌 ‘보호자(custodian)’가 되기로 했다. 미술품 역시 삭을 수 있으며, 판매나 소유의 대상이 아님을 받아들인 것. 13년이 지나면 작품의 보관 방식에 대해 작가와 다시 협의한다고. 미술관이 작품을 독점 소유하고, 작가 사후에도 영속하게 하는 기존의 소장 방식에서 벗어난 것이다.

전시장을 나설 즈음엔 네덜란드 암스테르담대의 콜린 스털링 교수가 전시 관련 기고에 인용한 독일 철학자 아도르노의 말을 곱씹게 된다.

“사물이 분해돼 가는 모습을 ‘2번째 삶’으로 인식할 수 있고, 기억에 의해 매개된 그 2번째 삶에 사랑이 머문다.” 5월 3일까지.

#국립현대미술관#소멸#삭는 미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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