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호군(大護軍) 장영실이 만든 안여(安輿·임금이 타는 가마)가 견실하지 못하여 의금부에 내려 국문하다.”
조선의 대표적인 과학자 장영실은 ‘조선왕조실록’ 세종 24년(1442년) 3월 16일에 실린 이 기록을 끝으로 역사에서 자취를 감췄다. 2일 서울 중구 충무아트센터 대극장에서 개막한 뮤지컬 ‘한복 입은 남자’는 그 역사의 공백을 짐작해 보려는 시도에서 출발한다. 이상훈 작가의 동명 장편소설을 원작으로 한 이 작품은 조선의 천재 과학자가 유럽으로 건너가 어린 레오나르도 다빈치의 스승이 됐을지도 모른다는 상상을 무대 위로 옮긴다.
이야기는 바로크 시대 화가인 페테르 파울 루벤스의 그림 ‘한복 입은 남자’에 관한 다큐멘터리를 제작하려는 방송국 PD 진석이 이탈리아인 엘레나로부터 비망록 한 권을 건네받으며 시작된다. 진석이 역사학자 강배와 함께 기록 속 단서를 좇는 과정에서 장영실의 행방이 드러난다.
1막과 2막의 대비가 또렷해 다채롭게 극을 즐길 수 있는 게 장점. 조선을 배경으로 한 1막은 신분의 한계를 넘어 자신의 능력을 증명하려는 영실과 그의 가능성을 알아보고 뒷받침하는 세종의 관계를 중심으로 전개된다. 반면 2막은 역사적 상상력이 본격적으로 작동하는 구간이다. 정치적 사건에 휘말려 조선을 떠난 영실이 낯선 유럽에서 새로운 삶을 모색하는 과정이 빠른 호흡으로 펼쳐진다.
두 세계의 차이를 명확히 드러내는 무대 미술이 특히 흥미롭다. 조선은 지붕이 있는 궁궐 구조를 중심으로 따뜻하고 안정적인 영실의 공간임을 강조한다. 반대로 유럽은 지붕이 보이지 않는 광활한 공간에서 이질성과 개방감을 동시에 부각한다. 이런 대비는 장영실이 경험해야 했던 두 세계의 간극을 직관적으로 체감하게 한다.
배우들의 1인 2역 소화도 관전 포인트다. 장영실과 현대의 역사학자 강배는 박은태·전동석·고은성이 맡고, 세종과 PD 진석은 카이·신성록·이규형이 연기한다. 같은 배우가 과거와 현재를 오가는 것을 인지하며 펼치는 메타적 유머도 웃음을 자아낸다. 대취타와 태평소 같은 국악기와 서양 오케스트라가 함께 연주되며 동서양의 조화를 꾀한 음악 역시 매력적이다. 유럽에 남겨진 영실이 고국을 그리워하며 부르는 넘버 ‘그리웁다’는 절절한 외로움과 상실감을 또렷하게 전달하며 강렬한 인상을 남긴다.
다만 서사의 밀도 측면에선 아쉬움이 남는다. 장영실이 유럽으로 건너가 르네상스 문명에 영향을 미쳤다는 설정은 흥미롭지만, 2막에서 다빈치와의 관계가 전면에 부각되며 1막에서 공들여 쌓았던 세종과 장영실의 서사가 상대적으로 흐려진다.
그럼에도 ‘한복 입은 남자’는 한국 창작 뮤지컬이 대극장에서 구현할 수 있는 스케일과 미학을 안정적으로 보여준 작품. 장영실을 위인의 초상에 가두기보다, 국경과 시대의 경계에 놓인 한 인간으로 바라보려는 시도 역시 의미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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