후임 괴롭히는 軍선임과 악플러의 공통점은? [최고야의 심심(心深)토크]

  • 동아일보
  • 입력 2025년 2월 15일 14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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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루하고 심심하다는 이유로 아무 잘못 없는 대상에게 공격성을 드러내는 사람이 있다. 도대체 왜 이러는 걸까. 동물권 단체 ‘카라’ 제공


몇 년 전 초등학생들이 돌과 흉기 등으로 길고양이를 잔혹하게 학대한 사진을 찍어 소셜네트워크서비스(SNS)와 온라인 커뮤니티 등에 올린 일이 있었다. 해외에서도 10대들이 살아 있는 거북이, 햄스터 등을 전자레인지에 넣고 돌려서 죽인 뒤 SNS에 자랑해 문제가 되기도 했다. 이들의 범행 동기에는 공통점이 있었다. 바로 ‘심심해서’다.

일부 철없는 아이들만의 일탈은 아닐 것이다. 성인 중에도 심심하다는 이유로 아동이나 동물을 학대했다는 뉴스를 종종 찾아볼 수 있다. 협박, 욕설, 유언비어로 온라인을 도배하는 악성 댓글 작성자를 잡고 보니 ‘심심해서’ ‘장난으로’ 그랬다는 경우도 많다.

지루하고 따분한 ‘노잼(재미 없음)’ 상태에선 공격성이 나타나기 쉽다. 심심할 때는 뇌가 외부 자극에 민감하게 반응하는데, 남을 괴롭히면서 느끼는 쾌감이 평소보다 더 크게 느껴질 수 있어서다. 그래서 지루함과 가학성(sadism)은 매우 가까운 친구다. 심심하다는 이유로 말썽을 일으키고 주변 사람을 못살게 구는 심리를 알아보자.

● 무료하고 심심해… 악플 달고, 후임 괴롭혀

가학적인 성격 정도는 개인의 기질이나 환경같이 다양한 요인의 영향을 받는다. 그런데 지루한 상황에 처하면 평소보다 유독 못되게 행동하고 싶은 마음이 들 수 있다. 특히 같은 상황에서도 지루함을 남들보다 더 자주, 강렬하게 느끼는 사람일수록 그렇다.

◆ 지루함을 잘 느끼는 사람들 특징

·뭘 해야 할지 몰라 막막할 때가 많다
·아무것도 하지 않고 앉아 있을 때가 많다
·흥미를 느낄 만한 일이나 볼거리를 찾기 어려워한다
·일상을 즐겁게 지내기 어렵다
·해야 할 일이 반복적이며 단조롭다고 느낄 때가 많다
·다른 사람들보다 더 많은 자극이 필요하다
·무슨 일을 하든 제대로 된 동기부여를 받지 못한다
·흥미진진하고 다소 위험한 행동을 하지 않으면 지루함을 느낀다

단축형 지루함 성향 척도(SBPS)
슈테판 프파타이허 덴마크 오르후스대 심리학 및 행동과학과 교수와 에린 웨스트게이트 미국 플로리다대 심리학과 교수 등으로 이뤄진 공동 연구팀은 총 7617명을 대상으로 9개 실험을 통해 지루함과 가학성의 관계를 연구했다. 그 가운데 몇 가지 연구를 소개한다.

첫 번째 연구에서는 1780명을 대상으로 지루함을 느끼는 성향, 가학성, 성격 등을 검사해 상관관계를 살펴봤다. 가학성 검사 문항에는 ‘나는 사람들을 다치게 하는 것을 즐긴다’ ‘사람들이 고통받는 것을 보는 게 즐겁다’ ‘선혈이 낭자한 비디오 게임을 좋아한다’ 등이 포함됐다.

미국의 10대 소녀가 자신이 기르던 새끼 거북이를 전자레인지에 넣고 돌리는 사진을 소셜네트워크서비스(SNS)에 올려 문제가 됐다. X(옛 트위터) 캡처
미국의 10대 소녀가 자신이 기르던 새끼 거북이를 전자레인지에 넣고 돌리는 사진을 소셜네트워크서비스(SNS)에 올려 문제가 됐다. X(옛 트위터) 캡처

그 결과 평소 지루함을 잘 느끼는 사람들이 가학성도 높은 것으로 나타났다. 재미있는 점은 이들이 원래 남을 괴롭히는 걸 좋아하는 사이코패스나 나르시시스트는 아니라는 것. 사이코패스나 나르시시스트 성향이 결과에 영향을 미치지 못하도록 분석 과정에서 이를 통제한 뒤 결과를 도출했을 때도 지루함을 자주 느끼는 사람에게서 더 높은 가학성이 나타났다. 평소 특별히 못된 사람이 아니더라도 지루할 때 가학성이 높아질 수 있다는 얘기다.

후속 연구에서는 만성적인 지루함을 느끼는 사람들이 실제 어떤 방식으로 남을 괴롭히는지 각각 살펴봤다. 자주 지루해 하는 사람들은 온라인에서 악플러로 활동할 가능성이 큰 것으로 나타났다. 장난으로 지인들에게 혐오스러운 웹사이트 주소를 보내는 악취미도 있었다.

군 복무를 지루하게 느낀 사람일수록 후임을 괴롭힌 경험이 많은 것으로 조사됐다. 기사와 직접 관련 없는 사진. 동아일보 DB
군 복무를 지루하게 느낀 사람일수록 후임을 괴롭힌 경험이 많은 것으로 조사됐다. 기사와 직접 관련 없는 사진. 동아일보 DB

군 복무 중 후임을 괴롭힌 경험이 있는 사람도 마찬가지다. 현역 군인거나 군인이었던 적이 있는 미국인 289명을 조사한 결과 군 복무 중 지루함을 많이 느낀 사람일수록 동료 병사들에게 언어적, 신체적 가학 행위를 많이 저지른 것으로 나타났다.

심심하다는 이유로 자녀에게 언어나 물리적인 폭력을 휘두르는 부모도 있다. 미국 캐나다 영국의 미성년 자녀가 있는 300명을 연구한 결과 지루함을 잘 느끼는 성향의 부모는 아이에게 비아냥거리거나, 아이를 때리는 경향이 더 두드러졌다.

드라마 ‘더 글로리’에서 학창 시절 끔찍하게 주인공을 괴롭히는 박연진(신예은 분). 넷플릭스 제공
드라마 ‘더 글로리’에서 학창 시절 끔찍하게 주인공을 괴롭히는 박연진(신예은 분). 넷플릭스 제공

학교 폭력도 마찬가지다. 세르비아에서 만 10~18세 학생 1038명을 대상으로 연구한 결과, 수업을 비롯한 학교생활을 지루하게 여기는 학생일수록 친구들을 괴롭히는 것으로 나타났다. ‘학교에서 즐겁게 지내기 어렵다’ ‘학교가 지루하다’고 답한 이들은 ‘학교에서 친구를 밀거나 주먹으로 때렸다’ ‘놀리거나 괴롭혔다’고 답하는 경향을 보였다.

● 재미 삼아 벌레 죽이기?

연구진은 심심하다는 이유로 살아 있는 생명체를 죽일 수 있는지도 알아보고 싶었다. 앞서 초등학생이나 10대 청소년이 고양이, 거북이, 햄스터를 “장난으로 죽였다”고 말한 것처럼 지루하고 따분한 순간에 실제로 생명을 해칠 만큼 잔혹해질 수 있는지 궁금했던 것이다.

실험에 참가한 독일 성인 129명을 두 그룹으로 나눴다. 첫 번째 그룹에게는 혼자 앉는 칸막이 부스에서 폭포수가 떨어지는 지루한 영상을 20분 동안 보여줬다. 두 번째 그룹은 알프스와 관련한 다큐멘터리를 봤다. 첫 번째 그룹이 본 폭포수 영상에 비해 꽤 볼 만한 내용이었다.

영상을 보는 동안 이들 옆에 살아 있는 벌레(구더기)와 분쇄기를 같이 놔뒀다. 원한다면 영상을 보면서 벌레를 분쇄기에 넣어도 된다고 알려 줬다. 벌레에게는 최대한 인격적인 느낌이 들도록 ‘토토’ ‘키키’ 같은 이름을 붙였다. 참가자의 잔혹성을 시험해 보려는 의도였다. 참가자들에게는 벌레를 넣고 분쇄기를 작동시키면 벌레가 갈려서 죽을 거라고 안내했다. 하지만 실제로는 소리만 나고 작동하지는 않았다.

1인용 부스에 영상을 볼 수 있는 노트북과 각각 이름이 적힌 종이컵에 든 벌레, 그리고 벌레를 갈아서 죽이는 분쇄기가 놓여 있다. 사진 출처 미국심리학회지
1인용 부스에 영상을 볼 수 있는 노트북과 각각 이름이 적힌 종이컵에 든 벌레, 그리고 벌레를 갈아서 죽이는 분쇄기가 놓여 있다. 사진 출처 미국심리학회지

영상이 아무리 지루하다고 해도 살아서 꿈틀거릴 뿐 아니라 이름까지 있는 벌레를 갈아 죽이기란 쉽지 않아 보인다. 실제로 참가자 129명 가운데 116명은 벌레에 손을 대지 않았다. 13명만 벌레를 분쇄기에 넣었다.

이 13명은 모두 가학 성향이 높게 나타난 사람들이었다. 이 중 12명은 폭포수 영상을 본 사람들이었다. 가학 성향이 높을수록, 영상을 보며 지루함을 많이 느꼈다고 답한 사람일수록 벌레를 많이 죽였다. 이들은 벌레를 분쇄기에 넣을 수 있어 ‘기뻤다’ ‘흥미로웠다’ ‘만족스러웠다’고 답했다. 연구진은 “지루한 환경은 가학성이 나타나도록 돕는 매개가 될 수 있다”고 분석했다.

● 지루하다고 스스로에게 전기 충격 주기도

때로는 지루함으로 인한 공격성이 자신을 향하기도 한다. 지루한 것보다는 아픈 게 낫다고 여길 때도 있다.

네덜란드 마스트리흐트대 심리학과 연구진은 성인 30명을 대상으로 앞서 영상 보여 주기 실험과 비슷한 연구를 진행했다. 이번에는 영상을 보는 동안 자신의 팔 안쪽에 붙인 전기 충격 장치를 작동시키는 버튼을 줬다. 처음에는 85초짜리 영상이 60분간 반복되는 영상을 보여줬고, 그다음에는 60분짜리 흥미로운 다큐멘터리를 보여 줬다.

사람들은 지루한 영상을 60분간 볼 때 자기 팔과 연결된 전기 충격 버튼을 평균 22회 이상 눌렀고(왼쪽 검은 막대), 상대적으로 흥미로운 영상을 볼 때는 2회 정도로 줄었다(오른쪽 막대). 출처 국제 학술지 에피타이트(Appetite)
사람들은 지루한 영상을 60분간 볼 때 자기 팔과 연결된 전기 충격 버튼을 평균 22회 이상 눌렀고(왼쪽 검은 막대), 상대적으로 흥미로운 영상을 볼 때는 2회 정도로 줄었다(오른쪽 막대). 출처 국제 학술지 에피타이트(Appetite)

영상이 모두 끝나고 확인해 보니, 지루한 영상을 보는 사이 참가자의 90% 이상이 평균 22.4회 전기 충격 버튼을 눌렀다. 지루함을 이겨 보려고 스스로 따가운 고통을 택한 것이다. 반면 흥미로운 다큐멘터리를 볼 때는 참가자 30% 정도만이 평균 2.4회 전기 충격 버튼을 눌렀다.

● 지루함은 무조건 나쁜 감정일까?

그렇다고 지루함이 꼭 나쁜 결과만 가져오는 것은 아니다. 오히려 창의성이 발휘되도록 긍정적인 영향을 미치기도 한다. 휴식을 취하거나, 집중할 필요 없는 반복적인 일을 할 때 뇌의 12개 부위가 연결된 디폴트 모드 네트워크(default mode network)가 활성화되는데, 이때 새로운 아이디어가 떠오르는 등 창의성이 발휘될 가능성이 커진다.

세계적 베스트셀러 ‘해리포터’ 시리즈는 열차를 타고 가다 느낀 지루함이 낳은 산물이다. 지루한 감정을 느낄 때 단순히 쾌락을 추구할 것인지, 생산적인 고민을 할 것인지는 스스로 결정할 수 있다. 동아일보 DB
세계적 베스트셀러 ‘해리포터’ 시리즈는 열차를 타고 가다 느낀 지루함이 낳은 산물이다. 지루한 감정을 느낄 때 단순히 쾌락을 추구할 것인지, 생산적인 고민을 할 것인지는 스스로 결정할 수 있다. 동아일보 DB

‘해리포터’ 시리즈 작가 J. K. 롤링은 1990년, 자꾸만 연착하는 런던 행 열차 안에서 동그란 안경을 낀 깡마른 소년 이미지를 떠올렸다고 한다. 그는 한 인터뷰에서 “당시 펜도 없었고, 기차에서 남들에게 펜을 빌리기도 너무 부끄러워서 내내 혼자 생각하며 해리포터 소설을 구상했다”고 밝혔다. 지루함이 창작 활동에 긍정적 영향을 준 것이다.

천재 작가에게나 해당하는 이야기라고 생각할 수 있겠지만 일반인에게도 이런 효과가 나타날 수 있다. 영국 센트럴랭커셔대 심리학과 연구팀 연구 결과, 실험 참가자들에게 전화번호부 읽기 또는 필사하기처럼 의미 없고 반복적인 일을 시켜 지루함을 유발한 다음 창의력을 테스트하는 문제를 냈더니 평균 수준보다 더 높은 점수를 받았다.

지루함을 연구해 온 안드레아스 엘피도루 미 루이빌대 철학과 교수는 “지루함이 삶에 도움이 될지, 해가 될지는 각자의 선택에 달렸다”고 강조한다. 그에 따르면, 지루한 감정은 현재 상황이 만족스럽지 못할 때 울리는 일종의 알람 같은 것이다. 현재 자신의 흥미, 관심사, 목표, 행복감 등과 관련해 불만족스러운 상태에 있다는 것을 말한다.

이때 남을 괴롭히는 일 같은 자극적인 흥밋거리를 찾을 것인지, 생산적인 일을 선택해 삶의 의미를 찾을 것인지는 나 자신에게 달려있다. 예를 들어 지루한 순간에 스마트폰을 들어 악성 댓글을 쓸 것인지, 오랜만에 친구에게 연락해 안부를 물을 것인지는 전적으로 내 선택이라는 것이다. 좀이 쑤시는 순간에 사람이나 동물을 괴롭힐 게 아니라 밖에 나가서 운동이나 산책을 하는 것도 한 방법이다. 순간순간이 지루하다는 이유로 충동적인 행동을 하기 전에 어떤 행동이 지금 나에게 가장 도움이 될지 생각해 보는 시간을 가져 보면 어떨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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