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챠(뽑기 캡슐)나 현질을 하지 않는 내게, 출산은 마치 인생을 건 슬롯머신 같았다. 아이가 건강히 태어날 확률, 지능이 좋을 확률, 잘생기거나 예쁠 확률. 콩 심은 데 콩 나온다지만, 수만 가지의 가능성이 내 머릿속을 헤집었다.
홀 아니면 짝. 50%의 확률로 아들이 당첨됐다. 아들이라니. 나는 절망했다. 미디어 속에는 딸바보들의 이야기만 가득했다. 아빠와 아들에 관한 이미지는 쉽게 생각나지 않았다. 우연히 길에서 만난 아버지를 살해하는 오이디푸스 이야기만 떠올랐다. 어떻게 키워야 할지 막막했다.
아기가 태어나면 자연스럽게 부성애도 생길 줄 알았지만, 현실은 달랐다. 10개월을 뱃속에 품고 하루하루 아이와 관계를 맺어온 아내와 달리, 나는 단지 ‘책임’이라는 무게로 아이를 대할 뿐이었다. 그렇다고 아이를 사랑하지 않는 건 아니었다. 그러나 노트북 배경 화면을 아이 사진으로 바꾼다거나, 인스타그램에 아이의 일거수일투족을 올리는 직장 동료들처럼 할 정도는 아니었다. 아이가 너무 좋아서 육아휴직을 했다는 아빠들을 취재할 때면 나는 의아해했다. 솔직히 밖에 있는 게 더 편하지 않나?
아이를 대하는 내 태도는 늘 갈팡질팡했다. 친구 같은 아빠가 되고 싶은 마음과 동시에 경쟁이 치열한 세상에서 밀리지 않도록 강하게 키워야 한다는 압박감을 느꼈다. 잘해주다가도 아들이 별것 아닌 걸로 투정하면 불같이 화를 내곤 했다. 아들 나이 고작 세 살이었다. 이런 내 모습을 녹화해 오은영 선생님에게 보여주면 엄청나게 혼날 것 같았다.
‘낳아줬으니 감사해’라는 생각은 해본 적 없다. 아이는 태어나게 해 달라고 해서 태어난 존재가 아니었다. 아내와 나의 소망이 결실을 본 존재였다. 오히려 차은우의 얼굴, 이재용 회장의 부를 물려주지 못해 미안할 따름이었다. 적어도 내가 부모님께 받은 만큼은 해줘야 한다는 마음이 내 어깨를 짓눌렀다.
어릴 적 내게 부모님은 우주이자 신(神)이었다. 나는 아이에게 좋은 신이 되고 싶었다. 그러기 위해서 아이에게 뭘 해줄 수 있을지 고민했다. 가장 쉬우면서도 어려운 것, 바로 ‘시간’이었다. 육아휴직은 무리지만, 퇴근 후 아이와 보내는 시간을 철저히 챙기기로 했다.
나는 일이 끝나면 부리나케 집으로 직행했다. 더 많이 걷지만, 버스에 비해 퇴근 시간이 단축되는 지하철을 택했다. 집에서 아들과 레슬링 같은 몸 쓰는 놀이를 하거나, 자기 전에 영어 동화책을 한국어로 번역해 읽어주는 시간을 가졌다. 아들과 함께 뒹굴고 난 다음 날엔 온몸이 쑤셨고, 요즘 영어책은 왜 그리 어려운지 읽어주다가 버퍼링이 걸리기도 했다.
언젠가부터 아들은 나의 퇴근 시간을 기다리기 시작했다. 아내는 아들이 ‘아빠 언제 와?’라는 질문을 하기 시작했다고 했다. 내가 문을 열면 아들은 어택!을 외치며 전력 질주로 몸을 부딪쳤다. 아프지만 그만큼 반갑나보다 생각했다. 나는 기억나지도 않는, 즉흥적으로 해줬던 이상한 놀이를 아들은 똑같이 해 달라며 매달렸다. 아들은 그 순간을 좋은 기억으로 가지고 있었다. 나는 그것으로 충분하다고 생각했다.
올해로 아들은 7살이 됐다. 생각 이상으로 시간은 빠르게 흘러갔다. 다행히 아들은 큰 문제 없이 잘 자라주었다. 아들과 놀 수 있는 것들도 많아졌다. 축구도 하는가 하면 며칠 전엔 사우나에서 함께 시간을 보내기도 했다. 그렇다고 마냥 잘해주는 건 아니다. 여전히 나는 아이의 말썽에 소리를 지르거나 강압적으로 명령을 하기도 한다. 고집이 생긴 아들이 대드는 모습에 혈압이 오르기도 한다.
여전히 나는 부성애가 뭔지 모르는, 아버지가 되어가고 있는 무언가이다.
[소소칼럼]은 우리 주변에서 일어나는 일들이나 소소한 취향을 이야기하는 가벼운 글입니다. 소박하고 다정한 감정이 우리에게서 소실되지 않도록, 마음이 끌리는 작은 일을 기억하면서 기자들이 돌아가며 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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