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백예린은 그렇지 않아 [소소칼럼]

  • 동아일보
  • 입력 2024년 4월 2일 11시 08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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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수 백예린이 R&B 팝스타를 거쳐 록 밴드 보컬로 앨범을 낸 건 3년 전이다. 백예린의 중저음 보컬과 팝스러운 멜로디는 록밴드 더 발룬티어스(The Volunteers)에서 지글거리는 기타와 억센 드럼 사운드에 맞서면서 세련된 균형감을 만들어낸다.

2021년 백예린의 록 밴드 보컬 변신을 두고 임희윤 대중음악 평론가(a.k.a 희미넴, 전 동아일보 기자)는 당시 인터뷰에서 “‘눈의 꽃’의 나카시마 미카가 영화 ‘나나’에서 펑크 록커로 변신했던 것”에 빗댔다.

[단독 인터뷰] 백예린 “전작이 동화같았다면…2집은 솔직한 일기장 같아”
그 말엔 복합적인 의미가 담겨있다. 마치 새 배역을 맡은 영화배우처럼 돌연한 변신의 느낌을 자아낸다는 것. 그리고 동시에 R&B 기반 팝가수가 거친 사운드로 중무장한 록 밴드 보컬로 변신한 사례를 찾자니, 그만큼 드물다는 것이다. 그런 와중에 백예린은 록 밴드에 너무 진심이라, 가사에도 상당한 분노가 실려 있다. 가사에 관한 질문에 그는 이렇게 대답했다.

“팬이나 대중이 저를 떠올릴 때 원피스를 입은 하늘하늘한 예린, 페스티벌 예린… 이렇게 많이 생각해주시는데 그런 것들을 많이 깨보고 싶었나 봐요.” (로커 변신 백예린 “늦게 온 사춘기처럼, 록의 세계에 빠져들어”)

맞다. 백예린 하면 가장 먼저 떠오르는 이미지는 그때나 지금이나 2017년 ‘해브 어 나이스 데이’ 페스티벌에서 초록색 원피스를 입고 바람을 맞으며 당시로선 미발표곡 ‘스퀘어’를 부르는 모습이다. 강렬한 인상이라, 그 영상을 보는 동안엔 내가 아저씨 몸에 갇힌 백예린 감성이라는 걸 깨닫게 될 정도였다.(나 그랬구나!)

록 밴드 보컬로서의 변신은 나 같은 뜨내기 팬을 비롯해 팬들의 기대감을 의식하기에 의도적으로 엇나간다는 식이었다. 음악으로 자신을 표현할 때 백예린은 묘하게 이율배반적이다. 그의 음악이 감동을 자아낸다면, 자신을 표현하는 과정에서의 고민과 해석이 노래에 섬세하게 묻어나기 때문일 것이다. 그리고 이는 백예린이 쌓아온 독보적인 캐릭터이기도 하다.


최근 인공지능(AI)으로 합성된 백예린의 목소리를 들었다. 합성된 소리는 영화 라붐 OST 리얼리티(Reality)를 부른다. 음색은 판박이다. AI 예린이 완곡할 때 그것이 감동적으로 느껴지기도 한다. 하지만 이내 깨달았다. 그 감동이란 현실에서의 백예린이 다지면서 만들어온 단단한 캐릭터와 자아를 떠올리게 하기 때문임을. AI는 들어줄 만하지만, 거기엔 독자적인 매력은 없다.

백예린은 더 발룬티어스 보컬로서 같은 곡을 커버한 적이 있다. 그때 현실에서의 백예린은 장미 가시를 밟는 처절한 사랑을 끝낸 뒤인 것만 같다. AI 예린은 원곡의 늦은 밤 포근하고도 사랑스러운 기운을 담아낸다. 실제 이 곡을 커버하는 현실에서의 백예린은 외롭게 낮게 읊조린다. 같은 음색으로 음표를 실수 없이 회수하는 AI엔 없는 매력이다. 시행착오 속에서 만들어낸 단단한 감동이 없고, AI는 그저 실재하는 백예린의 캐릭터에 기댄다.

AI 커버는 아무리 잘 부른 노래라도 매력적인 캐릭터 없인 공허하다는 것. 유튜버 침착맨이 부르는 ‘시티팝’과 스타크래프트 해설가 전용준이 부르는 발라드도 마찬가지다. 현실에서의 독보적인 캐릭터 없인 아무리 잘 부른 노래도 재미를 주지 못한다. 그리고 캐릭터란 오랜 세월 동안 도전하고 실수하고 시행착오를 겪고 고민하고 다시 나아가는 인간만의 영역이다. 이쯤 되니 백예린 음악은 AI에 맞선 존 코너 같기도.

그런 점에서 이승재 기자의 무비홀릭 칼럼 ‘GPT와 영화 평론을 대결하다’의 마지막 말이 더욱더 그럴싸하게 느껴졌다. “북두칠성처럼 빛나는 인간의 흑심은 죽어도 챗GPT가 넘어서지 못할 테니까요.” 으흠, 과연 그렇다.

[소소칼럼]은 우리 주변에서 일어나는 일들이나 소소한 취향을 이야기하는 가벼운 글입니다. 소박하고 다정한 감정이 우리에게서 소실되지 않도록, 마음이 끌리는 작은 일을 기억하면서 4명의 기자가 돌아가며 씁니다.

임현석 기자 lhs@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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