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렴한 책을 사면 배송비 때문에 더 비싸진다?… 출판계 ‘1만6800원 경제학’

  • 동아일보
  • 입력 2023년 6월 5일 10시 09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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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가 1만6800원인 장편소설 ‘없는 층의 하이쎈스’. 창비 제공.
정가 1만6800원인 장편소설 ‘없는 층의 하이쎈스’. 창비 제공.

“신간 정가를 1만6800원으로 정했을 때 독자 반응을 분석하라.”

최근 한 출판사 대표는 마케팅 담당 부서에 이런 지시를 내렸다. 올 2월 교보문고, 예스24, 알라딘 서점 3사가 온라인 무료배송 기준을 주문가 기존 1만 원에서 1만5000원, 배송비는 2000원에서 2500원으로 올린 상황을 고려한 것이다. 이 출판사 대표는 “배송기준과 배송비 인상으로 독자가 저렴한 책을 샀을 때 오히려 더 비싼 돈을 내고 있다”며 “독자 반응에 따라 신간 정가를 정할 계획”이라고 했다.

출판계에 이른바 ‘1만6800원 경제학’이 떠오르고 있다. 서점이 배송기준을 올리면서 책을 단 한 권만 샀을 때 정가가 1만6800원에 미치지 못하면 독자가 배송비를 내야 하기 때문이다. 2014년 시행된 도서정가제에 따라 온라인에서 책값은 최대 10%까지 할인되는 상황도 영향을 미쳤다.

에세이 ‘형사 박미옥’. 이야기장수 제공.
에세이 ‘형사 박미옥’. 이야기장수 제공.

예를 들어 정가 1만6800원 책은 온라인에서 10% 할인된 1만5120원에 살 수 있다. 무료배송 기준인 1만5000원 이상이라 배송비를 내지 않는다. 반면 정가 1만6600원 책은 10% 할인해 1만4940원에 산다. 무료배송 기준에 미달해 배송비 2500원을 더 내야 한다. 총 결제금액은 1만7440원으로 싼 책을 샀을 때 돈을 더 낸다. 정가 1만6700원 책도 10% 할인하면 1만5030원이지만 가격을 ‘짝수’로 정해야 책이 더 잘 팔린다는 출판계의 암묵적인 공식이 반영됐다.

베스트셀러엔 무료배송 기준에 미치지 못하는 책이 많다. 실제로 지난달 마지막 주 알라딘 종합 10위에 든 도서 중 8개가 무료배송 기준에 못 미친다. 대표적으로 장편소설 ‘눈부신 안부’(문학동네·7위)는 1만6000원, 산문집 ‘이적의 단어들’(김영사·9위)은 1만4800원, 만화 ‘원피스 105’(대원씨아이·10위)는 5500원이다.

소설집 ‘이리하여 아무도 없었다’. 현대문학 제공.
소설집 ‘이리하여 아무도 없었다’. 현대문학 제공.

신간 정가를 1만6800원으로 정하는 흐름은 이미 대세다. 교보문고에 따르면 지난달 출간된 신간 중 정가가 1만6800원인 책은 100종이다. 지난해 5월(46종)에 비해 2배 이상 늘어난 수치다. 배송기준이 바뀐 올 2월 기준으로도 상승세가 드러난다. 정가 1만6800원인 책은 올 1, 2월 각각 36, 44종이었다. 하지만 올 3, 4월엔 각각 99, 117종으로 늘어났다. 지난달 출간 책 중 정가 1만6800원인 건 장편소설 ‘없는 층의 하이쎈스’(창비), 소설집 ‘이리하여 아무도 없었다’(현대문학), 에세이 ‘형사 박미옥’(이야기장수), 에세이 ‘아니 에르노: 이브토로 돌아가다’(사람의집) 등 문학 에세이 분야가 눈에 띄었다. 다른 출판사 대표는 “문학과 에세이는 독자가 가볍게 읽을 수 있는 ‘얇은 책’이 대세라 가격이 1만 원 중반을 넘지 않는 경우가 많다”며 “무료배송 기준 인상으로 문학 에세이 출판사 반응이 가장 크다”고 했다.

책값 인상이 출판계 불황으로 이어질 수 있다는 지적도 있다. 신종 코로나바이러스 감염증(코로나19) 유행 이후 영화관이 티켓값을 올렸다가 관객 반발을 산 것처럼 소비자 반발이 예상된다는 것이다. 이 때문에 유료 회원에게 책 무료배송을 제공하는 ‘쿠팡’에서 많이 팔리는 ‘어린이책’은 책값 인상을 고려하지 않고 있다. 표정훈 출판평론가는 “웹소설, 웹툰 등 무료나 저렴하게 접할 수 있는 온라인 콘텐츠가 늘어나면서 책값에 대한 저항감이 늘어났다”며 “책에 차별화된 콘텐츠를 담거나 소장욕을 극대화해 고급 콘텐츠로서의 장점을 높여야 한다”고 했다.

에세이 ‘아니 에르노: 이브토로 돌아가다’. 사람의집 제공.
에세이 ‘아니 에르노: 이브토로 돌아가다’. 사람의집 제공.


이호재 기자 hoho@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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