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기저기 아파 ‘병원 쇼핑’ 해도 원인 알 수 없다면? [최고야의 심심(心深)토크]

  • 동아일보
  • 입력 2022년 11월 27일 08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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몸과 마음은 연결되어 있다. 몸이 아프면 마음이 쉽게 지치고 우울해지듯 마음도 힘들면 몸의 이곳저곳이 아프면서 “나 좀 봐 달라”는 신호를 보낸다. 게티이미지뱅크
몸과 마음은 연결되어 있다. 몸이 아프면 마음이 쉽게 지치고 우울해지듯 마음도 힘들면 몸의 이곳저곳이 아프면서 “나 좀 봐 달라”는 신호를 보낸다. 게티이미지뱅크

# 광고업계에서 일하는 10년 차 직장인 정상훈 씨(38·가명)는 위염 증상, 목 주변 근육통, 두통을 달고 산다. 특히 위통이 심해 프로젝트 마감 직전에는 위를 꽉 쥐어짜는 듯한 통증으로 물도 못 마실 정도다. 체중이 7㎏이나 빠져 위내시경 검사를 해봤는데 위가 약간 부어 있다는 소견 외에 이상은 없었다. 소화기내과 약을 한 달 이상 먹고, 300만 원이 넘는 한약도 먹어봤지만 별 효과가 없었다.

# 주부 이은혜 씨(51·가명)는 가슴 통증, 복통, 어지럼증 등이 느껴질 때마다 유방암, 췌장암, 심장질환, 혈관질환, 뇌질환 환자들을 위한 정보공유 온라인 커뮤니티에 가입했다. 이렇게 가입한 커뮤니티는 벌써 9곳이 넘었다. 최근에는 두통이 심해져 뇌종양이 의심돼 컴퓨터단층촬영(CT)을 했다. 결과는 정상이었지만, 이 씨는 CT만으로는 뇌종양을 발견할 수 없을지 모른다는 생각으로 온종일 불안하다.

몸과 마음은 연결되어 있다. 암 같은 중증 질환 환자의 우울증 발병률이 높은 것처럼 거꾸로 마음이 힘들거나 아플 때도 몸에 반응이 나타난다. 물론 신체 증상의 원인은 생물학적, 유전적 등 다양한 요인이 있을 수 있어 정밀한 검사가 필요하다. 하지만 특정 증상에 오랫동안 시달리며 여러 병원에서 CT, 자기공명영상(MRI), X레이 등 각종 검사를 받아 봐도 뚜렷한 원인이 나오지 않았다면 몸이 아니라 마음에 원인이 있지는 않은지 점검해볼 필요가 있다.
고통받은 마음 대신 몸이 말하는 ‘신체화’
‘신체화’란 의학적으로 명확히 아픈 원인을 설명할 수 없지만 심리적인 원인에 의해 몸이 계속 아프고 불편하게 느껴지는 것을 말한다. 주요 증상으로는 △근육통 또는 신경통 △소화 불량 △과민대장증후군 △만성 피로 △두통 △불면증 △식도 이물감 등이 있다. 만약 주변에 특별한 질병은 없지만 몸이 여기저기 쑤시고 아프고, 밥도 잘 못 먹고, 잠도 잘 못 자는 이가 있다면 신체화 증상은 아닌지 살펴봐야 한다.
●신체화 증상 예시

① 일반적 신체 증상 : 근육통, 무기력감, 땀, 입 마름, 얼굴 화끈거림 등
② 소화기계 증상 : 구토, 메스꺼움
③ 신경계 증상 : 두통, 어지럼증, 손발의 저림이나 떨림 등
④ 심장 및 호흡기계 증상 : 가슴 두근거림, 가슴 답답함, 숨 막힘, 가슴의 열감 등
⑤ 비뇨생식기계 증상 : 생리불순, 생리통, 하복부 통, 성기능 이상 등

출처: 서울아산병원

일시적으로 앞이 안 보이거나, 혼절, 마비, 경련 증세가 일어나 119구급차에 실려 응급실에 가는 경우도 생각보다 흔한 편이다. 드라마에서 충격적인 소식을 듣고 갑자기 정신을 잃으며 쓰러지는 장면도 신체화 증상으로 설명할 수 있다. 다만 갑자기 증상이 사라지기도 해 주변에서는 ‘꾀병’이라고 오해하기도 한다.

KBS 드라마 ‘삼남매가 용감하게’에서 극 중 장세란(배우 장미희)이 딸의 결혼식에 예비 신랑과 신랑 측 가족들이 오지 않았다는 충격적인 소식을 전해 듣고 쓰러지는 장면. KBS 화면 캡처
KBS 드라마 ‘삼남매가 용감하게’에서 극 중 장세란(배우 장미희)이 딸의 결혼식에 예비 신랑과 신랑 측 가족들이 오지 않았다는 충격적인 소식을 전해 듣고 쓰러지는 장면. KBS 화면 캡처

이런 증상이 심하게 나타날 경우 질병으로 진단받을 수 있다. 정신질환 진단 및 통계 매뉴얼(DSM-5)의 진단명은 ‘신체증상장애’다. 증상의 심각성에 대해 △과도한 생각을 지속적으로 하고 △높은 수준의 불안을 나타내며 △과도한 에너지를 투여하며 △걱정하는 기간이 6개월 이상 지속될 때 신체증상장애로 진단된다.

꼭 진단받지 않더라도 병원에서 ‘신경성’ ‘스트레스성’이라고 말하는 증상 대부분이 신체화 증상이라고 볼 수 있다. 한 국내 연구에서는 정신과 이외의 진료과에서 진료받은 사람 중 신체화 환자 비율이 11.5%에 달했다는 결과가 있다. 몸이 아프다고 생각해 병원을 찾은 10명 중 1명 이상이 사실 몸이 아닌 마음에 문제가 있었다는 것이다. 이들 대부분은 왕성하게 사회 생활을 하는 20~40대였다. “다들 그러려니” 하고 참는 각종 통증이 사실은 혹사당하고 있는 마음이 보내는 신호인지 모르고 살아간다는 의미다.

※국립정신건강센터 국가트라우마센터 신체증상 자가진단표(클릭)
“중병에 걸렸나 봐” 건강염려증
건강염려증도 마음의 병이 몸으로 반응하는 증상이다. 주로 불안이 높은 사람에게 많이 나타난다. 이들은 실제로 몸에 불편 증상이 생기긴 하지만, 이에 과도하게 집착하며 심각한 질병에 걸렸다고 끊임없이 생각한다. 소화가 잘 안되면 위암에 걸렸다고 생각하거나, 뭔가를 깜빡하면 치매에 걸렸다고 걱정하는 식이다. 이들은 증상에 대해 과도하게 집중하기 때문에 고통이 더욱 증폭된 것처럼 느낀다. 넘어져서 피가 난 상처를 계속 쳐다보고 있으면 더 아프게 느껴지는 것과 유사하다.
●건강염려증의 특징

·의료진의 말이 의심됨
·같은 증상 때문에
·작은 신체 증상도 큰 병이라고 확대 해석
·병이 있다는 믿음 때문에 사회 생활에 지장이 생김
·틈만 나면 건강 정보를 검색
·건강보조제에 지나치게 집착

건강염려증은 가족력이 있거나, 과거에 큰 병에 걸렸던 경험이 있는 이들에게 두드러지게 나타난다. 이들은 병원에서 검사 결과에 이상이 없다고 해도 안심하지 못하고, 병명이 나올 때까지 ‘병원 쇼핑’을 다닌다.

이때 민간치료사 등 대체의학에 현혹되는 경우도 있다. 신현균 전남대 심리학과 교수는 저서 ‘신체 증상 및 관련 장애’에서 “그들에게 치료받은 사람 중에는 일시적으로 병이 나았다고 느끼는 사람도 있다. 이는 원래 신체적인 병이 없는 상태에서 병이 나았다고 믿는 것이지 실제 병이 나은 것이라고 볼 수는 없다”며 “근본적인 심리적 문제가 치료되지 않았기 때문에 얼마 가지 않아 다시 재발할 수밖에 없다”고 강조했다.
왜 이런 증상이 일어날까?
정신의학, 심리학계에서는 신체화가 불안, 긴장, 우울, 분노 등 강렬한 감정들이 제대로 해소되지 못하고 억압됐을 때 주로 나타나는 것으로 본다. 자신의 감정을 표현하지 않고 잘 절제하는 것이 미덕이라고 여기는 아시아권에서는 이런 현상이 두드러진다. 한때 정신질환 진단 및 통계 매뉴얼(DSM-4)에 한국 문화 특유의 질병으로 분류됐던 ‘화병(Hwabyeong)’ 역시 이런 문화를 잘 보여준다.

특히 한국에는 스트레스를 받을 때 ‘머리가 지끈거린다’ ‘열 받는다’ ‘속이 답답하다’ ‘토 나온다’ 등 감정을 신체 증상으로 표현하는 경우가 많다. 직접적인 감정 표현 대신 신체 반응으로 표현하는 문화가 언어에도 드러난 것이다.

위장질환 치료제 광고를 패러디한 인터넷 짤.. 정신적 스트레스를 신체 증상으로 표현하는 우리 문화를 잘 보여준다. 네이버 블로그 캡처
위장질환 치료제 광고를 패러디한 인터넷 짤.. 정신적 스트레스를 신체 증상으로 표현하는 우리 문화를 잘 보여준다. 네이버 블로그 캡처

우울증은 신체화의 가장 흔한 원인이다. 미국 하버드대 부속 매사추세츠종합병원의 우울증임상연구센터에서 진행된 연구에 따르면 한국 우울증 환자는 미국 우울증 환자보다 건강염려증, 체중 감소, 불면증 등 신체적 반응이 월등히 높은 것으로 조사됐다. 반면 우울감, 죄책감 등 정서적 반응은 미국 우울증 환자보다 훨씬 낮았다. 해당 연구에 참여한 전홍진 삼성서울병원 정신건강의학과 교수는 “우리나라 사람들은 기분이 우울하면 몸에 힘이 없고 두통을 호소하는 신체 증상으로 표현한다“며 “이 때문에 신체 감각에 예민해지고, 불안이 높아지면 건강염려증으로 가기도 쉽다”고 말했다.

만성 불안도 자율신경계의 교감 신경을 활성화해 신체화에 영향을 미친다. 위기 시 활성화되는 교감 신경은 심장 박동이 빨라지고 동공이 확장되며, 근육으로 혈액이 몰려 힘쓸 준비를 한다. 이때 생존에 당장 필요하지 않은 소화 기능이나 생식 기능은 저하되는데, 만성 불안과 스트레스에 시달리면 평소에도 소화가 안 되거나 불임 가능성도 커지는 것이다.
신체화 여부에 따라 접근법 달라져
가장 우선적인 치료는 신체화 여부에 대해 아는 것이다. 몸이 아픈 원인이 신체냐, 정신이냐에 따라 접근법이 달라질 뿐만 아니라 미리 예방할 수도 있기 때문이다. 앞서 사례로 소개했던 직장인 정 씨의 경우 원인이 신체에 있다고 생각해 위내시경을 받고 한약과 양약을 먹었지만, 효과가 없었다. 만약 정 씨가 과도한 스트레스로 인한 분노, 불안 등이 원인이라고 생각했다면 운동, 휴식, 심리 상담 등 스트레스를 이완하는 시도를 해볼 수 있었을 것이다.

다른 사람에게 자신의 힘든 감정을 말하거나, 글쓰기를 통한 자기 표현은 긴장 완화에 효과적이다. 한성열 고려대 심리학과 명예교수는 “심리적으로 만들어낸 고통의 이유는 결국 스트레스를 피하고 싶고, 분노를 표현하고 싶은 마음의 소리를 들어달라는 것”이라며 “주변에서 ‘왜 또 아프냐’가 아니라 ‘오죽 힘들면 그러겠느냐’고 힘든 마음을 알아주기만 해도 스스로 헤쳐 나갈 수 있는 힘이 생긴다”고 했다.

온라인에 떠도는 불확실한 의학 정보에 기대 큰 병에 걸렸다고 함부로 판단하는 것도 금물이다. 불안이 과도해지면 자신에게 해당하지 않는 것까지도 모두 해당한다고 판단해 불필요한 병원 검사 비용을 지출할 수 있다. 전홍진 교수는 “자신에게 신체화 경향이 있다는 것을 정확히 알아야 중병이 의심되더라도 값비싼 검사 없이도 적절한 도움을 받을 수 있다”며 “대인관계 갈등이 생기면 갑작스럽게 신체화 반응이 강렬하게 나올 때가 있는데, 이를 미리 예측하고 그 상황을 피하는 데도 도움이 된다”고 말했다.


최고야 기자 best@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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