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통 예능 전수관 지어달라”…인간문화재 이영희, 50억대 땅 기부

  • 동아일보
  • 입력 2022년 4월 19일 13시 49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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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든이 넘은 저는 그동안 충분히 누렸으니, 이제는 전통 유산을 잇는 예술인들을 위한 공간을 남겨주고 싶습니다.”

국가무형문화재 가야금산조 및 병창 보유자 이영희 씨(84)는 자신이 일평생 일궈 소유한 집과 주변 토지 5474㎡(약 1700평)를 문화재청에 기부했다. 올 2월 기부 결단을 내린 그는 문화재청 측에 단 한 가지 조건을 내걸었다. “이 땅에 국악 등 우리의 전통 예능 유산을 잇는 보유자와 이수자들을 위한 교육관을 지어 달라”는 것.

문화재청은 “이 씨가 국가무형문화재 전수교육관 건립을 위해 경기 성남시 금토동 일대 1700평에 이르는 토지를 기부했다”고 19일 밝혔다. 이 씨의 자택이 위치한 해당 토지의 공시지가는 54억여 원에 달한다. 이 씨는 18일 오후 동아일보와의 전화인터뷰에서 “전통 예술인들의 삶은 늘 넉넉하지 못했다”며 “후학을 양성할 공간이 부족해 비좁은 자택에서 전수활동을 해온 예능인들에게 보탬이 되어주고 싶다”고 말했다.

문화재청은 이 씨의 기부로 수도권 지역에 거주하는 예능인들의 전수활동이 활성화될 것으로 기대하고 있다. 현재 서울 지역에는 강남구에 위치한 ‘국가무형문화재 전수교육관’ 한 곳뿐이다. 서울에 거주하는 국가무형문화재 전통공연·예술 보유자 77명을 전부 수용할 전수교육시설이 부족해 50여 명은 자택에서 전수활동을 이어갈 수밖에 없었다.

“저는 이제 떠나야 할 때예요. 문화재청에는 여생 동안 머물 20평 남짓한 공간만 전수교육관 한편에 내어달라고 했어요. 생을 떠난 뒤에는 이 땅에 납골함을 묻어달라고도 당부했죠. 저는 이 정도면 충분해요.”

1938년 전북 군산에서 태어난 이 씨는 1958년 가야금 명인 김윤덕 선생(1918~1978)으로부터 가야금산조를 배웠다. 1962년 대학 졸업 후 국악예술학교 교사, 서울대 및 중앙대 국악과 강사를 지내며 60년간 후학을 양성했다. 1991년 김 선생의 뒤를 이어 국가무형문화재 가야금산조 및 병창 보유자로 인정된 그는 아직까지도 주말마다 제자 10여 명에게 가야금산조를 가르치는 현역이다. 그에게서 가야금산조를 배운 이수자는 50여 명에 이른다.

늘 자신보다 제자들을 생각했다. 이 씨는 2018년부터 스승인 김윤덕류 가야금산조를 공부하는 후학들을 위해 매년 2~3000만 원 상당의 장학금을 지원하고 있다. 올해까지 10여 명의 학생들이 장학금을 받았다. 2018년 경기 성남시와 연계해 자택 근처 초등학교 4곳에 4000만 원 상당의 가야금 160대를 기증하기도 했다. 이 씨는 “일평생 나를 위해 사치를 부려본 적이 없었다. 내가 가진 것을 제자들과 나눌 때 가장 큰 기쁨을 얻었다”며 웃었다.

문화재청은 기부자의 뜻에 따라 해당 토지에 2027년까지 연면적 8246㎡ 규모의 수도권 국가무형문화재 예능전수교육관을 지을 계획이다. 지하 2층 지상 4층 규모 건물에는 이 씨의 바람대로 예능인들이 전수활동을 펼칠 교육공간뿐 아니라 공연장과 전통 예능 체험공간도 마련된다.

“국악에 대한 대중의 관심이 자꾸만 줄어들고 있어요. 그런데도 제게 와서 배우려고 하는 제자들이 얼마나 고맙고 예뻐요. 제가 힘닿는 데까지 이들을 밀어주고 끌어줘야죠.”


이소연 기자 always99@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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