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대를 넘어… 이 시대의 모든 ‘김지영’을 위하여[책의 향기]

  • 동아일보
  • 입력 2021년 6월 26일 03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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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가 쓴 것/조남주 지음/368쪽·1만4000원·민음사

작가 조남주는 첫 소설집 ‘우리가 쓴 것’에서 10대부터 80대까지 다양한 세대의 여성을 주인공으로 등장시키며 페미니즘 문학의 범위를 넓힌다. 주인공은 다른 여성의 손을 잡고 이해하며 개인의 고통을 집단의 문제로 인식하기 시작한다. 게티이미지코리아
작가 조남주는 첫 소설집 ‘우리가 쓴 것’에서 10대부터 80대까지 다양한 세대의 여성을 주인공으로 등장시키며 페미니즘 문학의 범위를 넓힌다. 주인공은 다른 여성의 손을 잡고 이해하며 개인의 고통을 집단의 문제로 인식하기 시작한다. 게티이미지코리아

‘말녀’라는 이름의 한 여자가 있다. 큰언니는 금주, 작은언니는 은주이건만 여자는 동주가 아닌 말녀였다. 말녀(末女)는 남아선호사상이 있던 시절 ‘마지막 딸이 되라’는 뜻으로 짓던 이름이었다. 여자는 어릴 적 엄마에게 “남동생이 둘이나 있는데 왜 계속 말녀라고 불러요?”라고 따져 물었지만 엄마는 묵묵부답이었다. 나이가 들어 할머니가 된 여자는 뒤늦게 자신의 이름을 동주로 바꾼다. 단편소설 ‘매화나무 아래’는 한 노년 여성을 주인공으로 내세우며 과거 여성이 겪었던 차별과 늦게라도 삶을 바꾸려 하는 여성의 삶을 차분히 보여준다.

2016년 출간한 장편소설 ‘82년생 김지영’(민음사)으로 문학계에 페미니즘 열풍을 불러일으킨 조남주(사진)가 첫 소설집을 내놓았다. 100만 부 이상 팔린 ‘82년생 김지영’처럼 여성에 대한 사회적 편견과 폭력적인 시선을 비판하는 조남주 문학의 특성은 여전하다. 다만 ‘82년생 김지영’이 30대 여성을 주인공으로 내세운 반면, 이번 소설집에 담긴 작품들은 청소년부터 노년까지 다양한 세대에 걸쳐 여성의 삶과 생각을 들여다보며 스펙트럼을 넓혔다.

‘여자아이는 자라서’는 고등학교에서 벌어진 몰래카메라 사건의 피해자의 엄마와 언니가 사건을 바라보는 상반된 시각을 보여준다. 중년인 엄마는 “남자애들은 생각이 없으니 이해해 줘야 한다”고 말하지만, 청년인 언니는 “상습범은 봐줄 수 없다”고 반박한다.

남편이 집을 나간 뒤 발을 동동 구르는 여자의 삶을 다룬 ‘가출’처럼 중년 여성을 차분히 관찰하기도 한다. 남편 없이 홀로 살아가기를 두려워하는 중년 여성을 묵묵히 응원하는 건 오직 그의 딸이다. 세대가 다른 여성들은 위기 앞에서 분열하기도 하지만 삶의 무거움을 버티기 위해 서로에게 기댄다.

여성 문제에 대한 천착은 여전하다. 한 여성이 남자친구의 청혼을 거절하는 ‘현남 오빠에게’는 권력적 우위에 있는 가해자가 심리적으로 피해자를 통제해 본인의 생각에 동조하게끔 만드는 가스라이팅이 벌어진 연애 문제를 다룬다. 중소기업에서 부당한 대우를 받는 여성이 등장하는 ‘미스 김은 알고 있다’는 직장 내 성차별 문제를 정면으로 지적한다.


일부에선 조남주의 문학을 비판하는 목소리가 있다. 조남주가 화제성이 높은 페미니즘을 의도적으로 주제로 삼아 상업적으로 이용하고 있다는 것. 조남주 관련 기사엔 남성의 고충은 무시하고 일방적으로 여성의 피해만 강조한다는 취지의 악플이 달리기 일쑤다. 그럼에도 조남주는 왜 이토록 끊임없이 여성의 삶을 소설로 쓸까 궁금했다. 자전적 소설 ‘오기’에서 악플에 시달리는 여성 소설가가 자신이 왜 소설을 쓰는지 되뇌는 독백이 조남주의 답변처럼 읽히는 듯하다.

“나는 내 경험과 사유의 영역 밖에도 치열한 삶들이 있음을 안다고, 내 소설의 독자들도 언제나 내가 쓴 것 이상을 읽어 주고 있다고 쓴다. 그러므로 이제 이 부끄러움도 그만하고 싶다고, 부끄러워 숙이고 숨고 점점 작게 말려 들어가는 것도 그만하고 싶다고, 그만하고 싶은 이 마음이 다시 부끄럽다고 쓴다.”

이호재 기자 hoho@donga.com
#김지영#우리가 쓴 것#조남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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