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독과 외로움의 차이?… 사전 장인의 마지막 ‘우리말 어감 사전’

  • 동아일보
  • 입력 2021년 5월 20일 03시 00분


코멘트

저자 안상순씨 34년 사전 외길… 헷갈리는 유의어 구별해 풀이
국내 사전편찬의 문제점도 지적… 1월 가제본 책 받고 3일만에 숨져
“앞으로 2주 남았다는 의사 말에 가장 먼저 한 일이 원고 챙기기”


‘공원에 벚꽃이 만발했다’는 문장을 ‘공원에 벚꽃이 만개했다’로 바꿔 쓸 수 있을까?

두 문장 모두 비문이 아니지만, 엄연히 의미가 다르다. ‘만발’을 쓰면 공원이 수많은 벚꽃으로 뒤덮였다는 뜻이지만 ‘만개’를 쓰면 벚꽃의 개화가 최고조에 이르렀다는 의미가 된다. 그런데도 일상에서는 유의어를 동의어인 양 서로 바꾸어 쓰는 경우가 잦다. 국어사전에서도 종종 발견되는 오류다.

의미가 비슷해 헷갈리는 단어들을 한데 모아 뜻풀이한 유의어 사전이 출간됐다. ‘우리말 어감 사전’(유유)에서 저자 안상순 씨(사진)는 ‘고독’과 ‘외로움’, ‘시기’와 ‘질투’ 등 비슷해 보이지만 미묘하게 어감이나 뉘앙스, 말맛, 쓰임이 다른 단어 90개 묶음의 의미를 구별했다. 안 씨는 1985년 사전전문편집회사인 신원기획 편집자로 출발해 금성출판사와 국립국어원을 거치며 34년간 사전을 만들었다.

유의어 의미 분별에 특별한 비법은 없다. 신문이나 출판물, 방송 등에서 드러나는 한국어 사용자의 언어 사용 양태, 즉 ‘말뭉치’를 풍부하게 수집한 뒤 그 차이를 일일이 솎아 내는 것이 유일한 방법이다. 가령 ‘고독을/외로움을 술로 달래다’와 같은 문장에서 ‘고독’과 ‘외로움’은 같은 뜻으로 어색하지 않게 쓰이고 있지만, ‘예술가는 운명적으로 고독과/외로움과 마주할 수밖에 없다’는 문장에서는 ‘외로움’이라는 표현이 어울리지 않는다. 저자는 여기에서 ‘고독’은 ‘쓸쓸함’이라는 의미에 더해 ‘자발적 고립’의 요소까지 포함하고 있다는 점을 발견해 낸다.

‘시기’와 ‘질투’는 어떨까. ‘영우는 찬경이를 질투했다/시기했다’는 문장에는 두 표현이 모두 쓰일 수 있지만 의미가 서로 달라진다. ‘질투’는 자기보다 우월한 상대에게 언짢은 기분을 느끼는 것이고, ‘시기’는 그런 상대를 미워하고 싫어하는 것을 뜻한다.

저자는 순환정의에 빠진 단어 뜻풀이도 바로잡고자 했다. 표준국어대사전은 ‘모습’을 ‘사람의 생긴 모양’으로, ‘모양’을 ‘겉으로 나타나는 생김새나 모습’으로 설명하고 있다. 이 경우 두 단어의 의미를 모두 모르는 사람은 사전을 찾아도 뜻을 이해할 수 없게 된다. 저자가 볼 때 ‘모습’은 표정, 동작 등 구체적이고 개별적인 형상을 가리키지만 ‘모양’은 추상적이고 유형적인 형상을 뜻해서 맥락이나 상황과는 무관하다. ‘산 위로 둥근 달이 떠오르는 모습’, ‘달 모양이 둥글다’는 두 문장은 각각의 단어가 모두 알맞게 쓰인 용례다.

저자가 유의어 분별 작업을 중요하게 생각한 이유는 무엇일까. 저자에게 직접 물을 수 있다면 좋겠지만 안타깝게도 그럴 수 없다. 지병을 앓던 안 씨는 집필 작업을 마친 직후 올해 1월 66세를 일기로 사망했다. 이 책은 그가 만든 마지막 사전이다. 그의 아내 박모 씨(61)는 “앞으로 2주 남았다는 주치의의 말을 듣고 남편이 가장 먼저 한 말이 ‘원고를 가져다 달라’는 것이었다. 가제본 된 책을 받고 3일 만에 세상을 떠났다”고 말했다.

저자 주변인들의 설명을 통해 그가 어떤 신념으로 책을 썼는지 짐작해 볼 수 있다. 국어를 오래 다룬 자가 빠지기 쉬운 실수가 스스로를 써도 되는 표현과 쓰지 말아야 할 단어를 구분 짓는 언중(言衆)의 선도자로 여기는 것이다. 저자는 반대였다. 언중의 한가운데에 머무르며 말과 글이 막힘없이 흐를 수 있도록 길을 내는 사람이기를 자처했다. 금성출판사에서 함께 일했던 한 동료는 “철저히 말뭉치에 근거해 단어를 수집하는 선배였다. ‘얼짱’과 같은 신조어도 언중이 널리 사용한다면 사전에 등재돼야 한다고 생각했던 분”이라고 말했다.

이번 책은 2017년 ‘최후의 사전 편찬자들’(사계절)을 집필하면서 안 씨를 인터뷰했던 웹사전 기획자 정철 씨의 제안으로 기획됐다. 정 씨는 “외래어를 우리말로 순화하는 국립국어원의 우리말 다듬기 회의 때도 안 선생님은 언제나 언중의 입장에서 아이디어를 내곤 했다”고 말했다. 여러 사람이 공간과 기기 등을 공유할 수 있는 공간을 뜻하는 ‘메이커 스페이스’가 ‘제작자 공간’이 아닌 ‘열린 제작실’이 된 것도 안 씨의 의견이었다.

저자는 책머리에 “이 책이 언어 규범서는 아닙니다. 언어 현실을 규범의 틀로 재단하기보다는 그 실상을 최대한 존중하고 싶었습니다”라고 적었다. 이 책을 절대 원칙이 아닌 현재의 언어문화를 잘 담은 가이드북 정도로 읽는다면 저자의 바람과 크게 어긋나지 않을 것 같다.

전채은 기자 chan2@donga.com
#우리말 어감 사전#유의어
  • 좋아요
    0
  • 슬퍼요
    0
  • 화나요
    0
  • 추천해요

댓글 0

지금 뜨는 뉴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