묵객들이 흠모한 남도회화 본가…집터마저 ‘화룡점정’

안영배 기자 입력 2021-04-30 16:08수정 2021-04-30 18: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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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남 해남의 녹우당, 진도의 운림산방
해남 녹우당 전경
남도의 정서와 전통을 표현한 ‘남도회화’의 산실로 꼽히는 두 집안이 있다. 전남 해남의 녹우당과 진도의 운림산방이다. 두 집안은 대를 이어 유명 예술가들을 배출해냄으로써 ‘예향(藝鄕) 호남’을 대표하는 가문으로 자리잡았다. 이들 집안의 화맥(畵脈)은 호남이라는 지역적 한계를 뛰어넘어 한국회화사에 큰 줄기를 형성한 것으로 평가받는다. 명가(名家)에 명인(名人)이 난다고 했던가. 어떤 집터이기에 수대에 걸쳐 걸출한 인물과 재능 넘치는 예인(藝人)들을 연달아 배출한 걸까.

진도 운림산방 전경


● 녹색 빛깔 쏟아지는 녹우당
해남읍 연동의 녹우당은 집터 규모만 1만평에 이르는 해남 윤씨의 종가다. ‘어부사시사’ ‘산중신곡’ 등 가사문학으로 유명한 윤선도(1587~1671)가 살았던 집으로, 그의 4대 조부인 윤효정(1476~1543)이 지은 고택이다.

500년 넘는 역사를 자랑하는 녹우당을 찾았을 때가 4월 말. 늦봄과 초여름 사이 나뭇잎이 우거질 무렵 내리는 ‘녹우(綠雨)’를 상징하듯, 주위는 온통 비처럼 쏟아지는 초록빛으로 가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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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효정이 길지를 골라 자리잡은 녹우당은 풍수의 눈으로 보아도 명당 터다. 덕음산(192m)을 배경으로 두고 주위로 성매산, 옥녀봉, 호산 등 사신사(좌청룡·우백호·남주작·북현무)가 녹우당이 들어선 마을(당시 이름은 백련동)을 포근하게 에워싸고 있다.

녹우당 앞뜰에 서서 바라보면 오른쪽(백호) 방향으로 붓처럼 끝이 뾰족하게 생긴 산봉우리(호산)가 특히 눈길을 끈다. 학자 혹은 문장가를 배출하는 기운이 있다고 해서 ‘문필봉(文筆峰)’이라고도 불리는 산봉우리다. 일제강점기 일본인들이 일부러 산 정상 부분을 깎아내렸다는 구전도 전해진다. 문필봉의 기운을 받아 인물이 배출되는 걸 막기 위해서였다고 한다.

녹우당에서 바라본 호산. 정상이 붓처럼 생겼다고 해서 문필봉이라고도 불린다.


덕음산 자락의 좋은 땅 기운과 주변 산 기운을 받아서였을까. 녹우당에서는 윤효정 이후 내리 10대에 걸쳐 과거 급제자들을 배출했다. 임진왜란과 병자호란 당시 의병을 이끌고 나라를 지키는 데 앞장선 윤구, 가사문학의 선구자 윤선도, 사실적인 초상화와 풍속화 등으로 조선 중기 사실주의 회화를 개척한 인물인 윤두서(1668~1715) 등이 대표적 인물들이다.

그런데 여러 대에 걸쳐 가문이 흥성하기 위해서는 좋은 터와 함께 전제 조건이 따른다. 바로 주위 사람들에 대한 베풂과 공덕이다. ‘적선지가필유여경(積善之家必有餘慶·적선하는 집안은 복이 자신뿐 아니라 자손에게도 미친다)’이라는 ‘소학(小學)’의 논리가 풍수에도 적용된다. 이곳 입향조(入鄕祖) 윤효정은 이 원리를 잊지 않았다. 부자였던 그는 심한 기근으로 세금을 내지 못한 농민들이 감옥에 갇히는 안타까운 사정을 보고 감옥문을 세 번이나 열어 구휼하는 적선을 했다. 이에 당시 임금 중종은 윤효정에게 ‘삼개옥문 적선지가(三開獄門 積善之家)’라는 어지를 내렸다.

현재 녹우당 앞뜰에는 그런 역사를 상징하는 은행나무 한 그루가 높이 솟아 있다. 윤효정이 과거에 급제한 아들을 기념하기 위해 심은 수령 500여 년의 나무다. 빛나는 가문이 오랫동안 유지되길 바라는 윤효정의 기원이 담긴 나무다.

녹우당 앞뜰에 있는 500년 수령의 은행나무. 이곳의 입향조(入鄕祖) 어초은 윤효정이 심은 나무다.


● 명당 혈(穴) 체험 명소된 사랑채
녹우당 뜰 안으로 들어서면 안채와 사랑채를 중심으로 행랑채와 문간채 등 여러 건물이 들어서 있다. 전체적으로 ㅁ자형의 건축 구조인데, 조선시대 상류 주택의 형식을 잘 나타내고 있다.

건물의 가장 중심인 안채는 현재 윤효정의 18대 종손(윤형식)이 살고 있어 관람객들의 출입이 제한돼 있다. 채광과 통풍을 위해 지은 솟을지붕이 돋보이는 안채의 마당은 정확히 명당 혈에 해당한다. 이 기운이 안채, 부엌, 창고 등으로 동심원처럼 퍼져나가면서 식구들에게 좋은 영향을 미친다.

명당 터에 자리잡은 안채

안채는 채광과 환기를 위해 지은 솟을지붕이 돋보인다.


빼어난 터에 자리잡은 건물들은 포도송이처럼 여러 곳에 혈이 맺힌 경우가 많은데 녹우당도 예외가 아니다. 사랑채 마당에 인공으로 조성한 연못 부근에도 또 다른 명당 혈이 맺혀 있다. 윤형식 종손의 아들인 윤성철 씨는 “풍수를 공부하는 사람들이 사랑채 연못가에서 장시간 머물며 명당 기운을 체험하고 간다”고 귀띔했다.

사랑채는 역사적 명소이기도 하다. 효종이 그의 스승이던 윤선도에게 하사한 경기도 수원 집을 현종 9년(1668)에 서해 뱃길을 통해 이곳에 몽땅 옮겨 온 것이다. 윤선도는 원래 있던 집에 덧대 이 명당 사랑채를 지었다. 사실 그는 임금에게 풍수 자문을 할 정도로 빼어난 풍수 실력을 갖추고 있었다. 녹우당의 소장품들을 전시하고 있는 ‘윤선도기념관’에는 이 집안에서 대대로 전해져 내려온 풍수 측정용 나침반이 있을 정도다.

사랑채에 조성한 인공연못. 명당 혈(穴) 체험 장소로 유명하다.


햇빛을 가리기 위해 이중 처마 구조로 지은 사랑채는 전국 유명 고가 중에서도 찾아보기 힘든 사례다.


한편으로 사랑채를 바라보면 조선 사대부의 높은 품격 또한 느껴진다. 햇빛을 가리기 위한 겹처마(이중 처마)가 인상적인 사랑채에는 동국진체(東國眞體)로 유명한 옥동 이서가 쓴 ‘녹우당’ 편액을 비롯해 ‘운업(芸業·늘 곧고 푸르며 강직한 선비)’, 원교 이광사가 쓴 ‘정관’(靜觀·선비는 홀로 있을 때도 자신의 흐트러진 내면 세계를 살펴 고친다)이라는 글씨가 걸려 있다. 녹우당 당주들의 삶과 정신세계가 담겨 있는 듯한 표현들이다.

동국진체로 유명한 옥동 이서가 써준 ‘녹우당’ 현판.


녹우당 뒤편은 망자를 위한 공간이다. 재실인 추원당을 비롯해 윤효정의 묘와 사당, 윤선도의 사당이 배치돼 있다. 더 뒤쪽으로는 500여년 수령을 자랑하는 비자나무숲(천연기념물 제241호)이 조성돼 있다. 덕음산의 산향(山香)을 즐기며 산책하기에 더없이 좋은 명소다. ‘綠雨堂(녹우당)’이라는 당호가 비자나무 숲이 바람에 흔들릴 때마다 내는 소리가 비가 내리는 듯하다 해서 지어졌다는 설에도 수긍이 간다.

비자나무 숲도 풍수와 관련 깊다. 윤형식 종손의 증언에 의하면 산에서 나무를 베어와 땔감으로 쓰던 옛날에도 마을 사람들이 비자나무만큼은 베어내지 못하도록 철저히 관리했다. 비자나무숲이 풍수 비보(裨補)로 조성됐기 때문이다. 덕음산은 원래 바위가 많은 산이었다고 한다. 허옇게 바위가 드러난 산이 있으면 그 마을이 융성하지 못한다고 보는 게 풍수적 해석이다. 그래서 녹우당 선조들이 사시사철 푸른 잎을 유지하는 비자나무를 골라 바위산을 가려버렸다는 것이다. 한편으로 녹우당 주인들은 비자나무 열매를 모아 마을사람들에게 구충제로 쓰도록 했고, 비자 열매 강정은 녹우당의 전통 다과상에 오르는 단골 메뉴가 됐다.

녹우당 뒤편의 비자나무 숲길.


녹우당에서는 의외의 인물들이 남긴 흔적도 만날 수 있다. 녹우당 정면에서 오른편에 있는 충헌각 건물은 철학자 도올 김용옥이 태어난 생가다. 김용옥의 진외가가 바로 녹우당이어서 그가 이 터에서 태어났다고 한다. 또 녹우당 왼편 차밭으로 일구어진 터에는 다산 정약용이 그의 어머니와 함께 머물다 가던 초당이 있었다고 한다. 녹우당의 종손은 “정약용의 외증조부가 공재(윤두서)인데, 친정을 그리워하는 손녀를 위해 공재가 초당을 지어주었다”고 말한다. 그때의 초당을 찍은 사진도 남아 있다. 정약용이 강진에서 유배 생활을 하는 동안 지어낸 ‘목민심서’ ‘경세유표’ 등 역작들도 녹우당의 서책을 빌릴 수 있었기에 가능했다는 것도 유명한 일화다.

공재 윤두서가 그린 자화상(국보 제240호). 윤두서의 외증손인 다산 정약용은 생전에 자신의 얼굴이 외증조부(윤두서)와 많이 닮았다는 말을 들었다고 전한다.


● 운림산방으로 이어지는 예술혼
녹우당은 윤두서 이후부터는 예술 명가로 부상하게 된다. 윤두서-윤덕희(아들·1685~1776)-윤용(손자·1708~1740)으로 이어지는 3대의 화풍은 17세기에서 18세기까지 호남 문인화단의 중심으로 우뚝 섰다. 그런데 조선 회화풍을 획기적으로 바꿔놓은 ‘녹우당 화풍’은 진도 출신의 소치 허련(1808~1893)에게도 큰 영향을 미치게 된다.

허련은 녹우당의 공재화첩을 통해 그림을 모사하며 그림의 세계에 깊이 빠져들었다. 이후 허련은 추사 김정희의 영향을 받아 우리나라 특유의 남종화풍을 정착시켰고, 남종화를 남도회화의 특징으로 자리잡도록 하는 데 결정적 역할을 했다.

허련이 1856년에 지은 진도군 의신면의 운림산방은 바로 그 남종화의 본향이다. 운림산방에서는 200년 남짓 5대에 걸쳐 허형, 허건, 허백련 등 10여 명의 뛰어난 화가들이 배출됐다. 운림산방 내 소치기념관에는 허련과 그 후손들의 작품이 전시돼 있다. 이곳에서 남종화의 진수를 체험할 수 있다.

진도에서 가장 높은 산인 첨찰산(485m) 자락에 자리잡은 운림산방은 아침저녁으로 피어오르는 안개가 구름숲을 이룬다고 해서 붙여진 이름이다. 이곳에 들어서자마자 마치 한 폭의 그림 속으로 빠져든 듯한 착각을 일으키게 된다. 허련이 남긴 문집인 ‘소치실록’에 의하면 큰 정원을 다듬고 아름다운 꽃과 희귀한 나무를 심어 선경을 꾸민 곳이라고 운림산방을 설명한다.

운림산방 역시 범상치 않은 기운을 가진 터다. 녹우당처럼 앞뒤좌우의 사신사가 뚜렷한 명당 터에 자리잡고 있다. 이런 터에 들어서면 몸과 마음이 차분하고도 평온해지는 느낌을 받게 된다.

운림산방의 운림지에 조성된 섬과 백일홍.


그런데 운림산방의 혈 자리는 사람이 사는 집이 아닌 자연물이 차지하고 있다는 게 특징적이다. 대표적인 게 소치 화실 바로 앞에 조성된 운림지다. 허련이 운림산방을 지으면서 계곡을 타고 흐르는 물을 끌어모아 조성한 인공 연못이라고 한다. 영화 ‘스캔들’의 촬영지로 유명세를 탄 운림지 한가운데로는 조그마한 섬과 그 중심에 서 있는 백일홍(배롱나무)이 인상적이다. 허련이 직접 심은 나무라고 한다. 바로 이 운림지 일대가 명당 혈에 해당한다. 예술가 허련은 명당 혈을 연못에 양보한 뒤 화실에서 연못을 바라보면서 그림으로 이를 표현하려 한 것은 아닐까. 자신 역시 평범한 초가집에서 살며 그림에 모든 것을 바쳐온 소치의 예술가 정신을 느껴 볼 수 있는 곳이 바로 운림산방인 것이다.

소치 허련의 작업 공간인 화실. 현재 일부 보수 작업중이다.

허련이 머물던 집. 그는 소박한 초가에서 살며 예술혼을 불태웠다.


또 다른 한 곳은 소치기념관 앞 일지매가 서 있는 자리다. 해남 대흥사 일지암에 머물던 초의선사가 제자인 소치 허련에게 선물로 주어 심었다는 나무다. 일제강점기 일본인들의 탐심에 휘둘려 하마터면 뺏길 뻔했던 일지매는 현재 운림산방을 수호하듯 서 있다. 일지매가 있는 터에서 사방을 둘러보면 운림산방의 이모저모가 한눈에 들어온다.

초의선사가 소치에게 기증한 일지매. 일본인에게 팔려 일본으로 넘어갈 뻔했던 역사를 가지고 있다.


해남의 녹우당과 진도의 운림산방은 비슷하면서도 다른 명당의 특징을 갖추고 있다는 점에서 동시 여행을 권할 만하다. 단 거리상 하루 코스로는 힘들기 때문에 해남에서 이순신의 명량해전으로 유명한 명량해협(진도대교)을 건너가 진도에서 하룻밤 묵어가는 걸 추천한다.

●가볼만한 곳=

쏠비치 진도에서 와인과 함께 밤 바다를 구경하는 커플.


호텔급 숙박지로는 운림산방과 ‘신비의 바닷길’을 인근에 둔 ‘쏠비치 진도’가 있다. 바닷가의 좋은 터에 있다는 이유도 있지만, 가족 여행을 즐기기에 안성맞춤이다. 요즘은 밤에 각종 와인을 맛볼 수 있는 ‘와인 투어’를 운영하고 있는데, 와인 한 잔과 함께 진도 밤바다 풍경을 즐기는 재미도 있다.

해남, 진도=안영배 기자·풍수학 박사 ojong@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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