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여정 연기 55년… 바람난 가정부서 소녀같은 엄마까지 ‘팔색조’

김재희 기자 입력 2021-04-27 03:00수정 2021-04-27 08:4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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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배우 첫 아카데미 연기상]세가지 키워드로 본 연기 인생-작품
① 에로티시즘
② 생계형 배우
③ 비전형적 할머니 연기
윤여정(74)은 스스로를 ‘생계형 배우’라고 말한다. 홀로 두 아들을 키우기 위해 단역이라도 닥치는 대로 맡았던 그는 “배가 고플 때 가장 좋은 연기가 나온다”고 밝히기도 했다.

윤여정의 모성애는 어머니로부터 받은 헌신적인 사랑의 결과물이었다. 그가 초등학생일 때 아버지가 돌아가셨고, 어머니는 일을 하며 세 딸을 홀로 키웠다. 어렸을 때부터 곧잘 공부를 한 자신을 ‘스타’라고 부른 어머니를 위해 윤여정은 탤런트가 되기로 마음먹는다. 한양대 국문과 진학 후 김동건 아나운서가 진행하는 프로그램에서 선물을 전달하는 아르바이트를 하던 그에게 방송국 관계자는 배우를 해보라고 권했다. 윤여정은 1966년 TBC 3기 탤런트 공채시험을 통과하면서 55년의 연기인생을 시작하게 된다.

○ 윤여정과 에로티시즘
화녀(1971년)
어머니를 향한 효심에서 출발해 배우의 길로 접어든 윤여정에게서 감독들은 ‘에로티시즘’을 봤다. 그의 진가를 처음 알아본 고(故) 김기영 감독도 그랬다. 서구적인 마스크와 허스키한 목소리에 매료된 김 감독은 당시 신인이던 그를 ‘화녀’(1971년)와 ‘충녀’(1972년)의 주연으로 발탁했다. 두 영화에서 윤여정은 성적인 매력을 발산하는 당돌한 여성 캐릭터를 창조해냈다. 화녀에서는 주인집 유부남과 바람이 난 가정부를 연기했고, 충녀에서는 아내의 권위에 눌려 발기부전을 겪는 남자의 후처가 돼 그의 아이를 낳아야 하는 명자를 연기했다. 감정의 극단을 건드리는 감독이자 ‘기인’으로 불린 김 감독은 윤여정을 “유일하게 내 말을 알아들은 배우”라고 평하기도 했다. 화녀로 윤여정은 대종상영화제 신인상, 청룡영화상 여우주연상, 스페인 시체스 국제영화제 여우주연상을 잇달아 수상했다.

20대의 윤여정으로부터 에로티시즘을 이끌어낸 이가 김 감독이었다면 중년을 맞은 윤여정의 숨은 에로티시즘은 임상수 감독의 손에서 빚어졌다. 임 감독의 ‘바람난 가족’(2003년)에서 윤여정은 성불구 남편을 놓고 남자친구와 성관계를 맺고 자식들에게 “나 섹스도 한다”고 말하는 홍병한을 연기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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돈의 맛(2012년)
윤여정은 ‘돈의 맛’(2012년)에서 모든 걸 가진 대한민국 상류층 노인 백금옥 역을 맡았다. 영화에서 그는 김강우가 분한 주영작과의 정사신도 감행했다.

죽여주는 여자(2016년)
이재용 감독의 ‘죽여주는 여자’(2016년)에서는 2만∼3만 원을 받고 노인들을 상대로 성매매를 하는 박카스 할머니를 연기했다.

○ “살기 위해 목숨 걸고 연기했다”
하녀(2010년)
김기영 감독부터 해외 유수 영화제에 진출한 임상수 감독까지 실력파 감독들의 페르소나로 낙점된 윤여정이지만 그에게도 설움의 시절은 있었다. 가수 조영남과 결혼한 직후인 1974년 미국행을 택한 윤여정은 이혼 후 1985년 한국에 돌아왔다. 당시 그의 나이 서른여덟. 화녀 흥행에 이어 MBC 드라마 ‘장희빈’에서 주연으로 단숨에 스타 반열에 올랐지만 11년의 긴 공백기를 딛고 재기하기는 쉽지 않았다. 독특한 목소리 탓에 호불호가 갈렸던 그는 이혼녀 낙인까지 찍히면서 ‘비선호도 연예인 1위’로 꼽히기도 했다. 그가 TV에 나올 때 “목소리가 듣기 싫다” “저 여자는 이혼녀다. TV에 나와서는 안 된다”는 시청자 전화가 걸려올 정도였다.

자칫 비호감으로 흘러갈 수도 있었던 그가 재기할 수 있었던 원동력은 ‘왕년의 윤여정’을 내려놓고 철저히 생존을 위해 연기한 강인함이었다. 홀로 두 아들을 키워야 했던 그에게 연기는 돈을 버는 생계수단이었다. 여우주연상을 수상한 신인 시절을 뒤로하고 단역까지 닥치는 대로 맡았다. 윤여정은 한때 MBC ‘전원일기’에 단역으로 출연했다. 그는 2009년 한 TV 예능 프로그램에서 “나는 생계형 연기자예요. 연기자가 가장 연기를 잘할 때는 돈이 궁할 때예요. 배가 고프면 뭐든 매달릴 수밖에 없어요”라고 밝히기도 했다.

‘한국 드라마의 대모’ 김수현 작가도 그가 자리를 잡는 데 힘을 보탰다. 김 작가의 데뷔작 ‘무지개’(1972년)에 출연하며 가까워진 두 사람은 미국에서도 편지를 주고받으며 우정을 쌓았다. 김 작가는 방송가에서 그를 기피할 때 윤여정을 파격적으로 캐스팅했다. 윤여정은 김수현과 ‘사랑과 야망’ ‘사랑이 뭐길래’ ‘목욕탕집 남자들’ 등 많은 작품들을 함께했다. 그가 맡은 역할은 주로 주연의 엄마 또는 이모였지만 먹고사는 것이 급했던 윤여정은 주·조연이나 단역을 가리지 않았다.

○ ‘비전형적 할머니’로 제2 전성기
고령화 가족(2013년)
“정작 내가 할머니 나이가 되면 (대본을 못 외워서) 할머니 역할은 못 맡을 것”이라고 말했던 윤여정. 그의 우려와 달리 윤여정은 70세가 넘어서도 ‘비전형적 할머니’ 캐릭터를 만들며 제2의 전성기를 맞았다. ‘고령화 가족’(2013년)에서는 세 자녀를 묵묵히 키워낸 강인함과, 담벼락 사이에 핀 꽃을 보며 설레는 소녀 감성을 동시에 가진 엄마를 연기했다. 이 영화를 연출한 송해성 감독은 “윤여정이 가진 소녀 같은 이미지 때문에 캐스팅했다. 그에게는 나이가 없다. 할머니, 엄마가 아니라 윤여정 그 자체”라고 말했다.

지푸라기라도 잡고싶은 짐승들(2018년)
영화와 드라마에 숱하게 나오는 치매노인도 그가 연기하면 뻔하지 않았다. ‘지푸라기라도 잡고 싶은 짐승들’(2018년)에서는 치매인지 아닌지 불분명한, 미스터리한 치매노인을 연기했는데, 10분 남짓의 짧은 출연분량에도 불구하고 압도적인 존재감을 드러냈다.

할리우드리포터는 “윤여정은 늘 겁 없고, 정통적이지 않은 여성상을 연기해 왔다. 순박한 시골 처녀가 팜파탈로 변신하는 화녀로 여우주연상을 휩쓴 뒤 전통을 뒤흔드는 역할을 맡아 왔다”고 평가했다.

이 매체는 ‘미나리’에서 그의 연기에 대해 ‘비전형적인 할머니’라고 정의했다. 윤여정은 미나리에서도 적극적으로 순자라는 인물을 구축했다. 밤을 깨물어 뱉은 뒤 손자에게 건네는 장면도, 손자와 함께 미나리가 심어진 곳을 찾아간 장면에서 “원더풀 미나리!”라고 외치는 대사도 그가 낸 아이디어다. 손주의 마운틴듀를 뺏어 먹고, 욕설을 내뱉기도 하지만 심장병을 앓는 손자를 위해 기꺼이 침대를 내주는 ‘순자’ 역할로 윤여정은 74세의 나이에 할리우드 스포트라이트의 중심에 섰다.

김재희 기자 jetti@donga.com
#윤여정#아카데미#여우조연상#미나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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