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살 나이 먹는건 쉽지만 진정한 어른 되긴 어려워

임준철 고려대 한문학과 교수 입력 2021-01-14 03:00수정 2021-01-14 03: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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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시를 영화로 읊다] <8> 새해 아침 거울을 보며
영화 ‘빅’에서 소년 조시는 소원대로 갑자기 어른이 된다. 내면은 여전히 소년이어서 수염 난 자신의 모습이 낯설기만 하다. 20세기스튜디오 제공
새해가 밝았다. 한 살을 먹어서 기쁜 사람이 있는 반면 나이가 드는 것이 반갑지 않은 사람도 있을 것이다. 연암 박지원(1737∼1805)은 스무 살이 되자 새해 아침 거울에 얼굴을 비춰 봤다. 드문드문 수염이 솟아 있는 게 아닌가. 그는 기뻐서 시를 썼다.


한시에서 거울에 비친 자신의 모습을 읊는 작품들은 보통 흰 머리나 수염을 통해 나이 드는 회한을 드러내곤 한다. 당나라 유장경(718∼790)은 설날 아침 거울에 비친 자신의 흰머리를 차마 볼 수 없다고 했건만(‘정조람경작·正朝覽鏡作’), 박지원은 겨우 몇 가닥 돋은 수염에 반색하고 있다. 해가 바뀌어 또 나이를 먹는 아쉬움이란 전통적 주제를 재치 있게 바꿔 쓴 것이다. 젊은 시절이라 가능한 일이기도 했지만, 후일 ‘열하일기’라는 남다른 여행기를 쓸 만한 자질이 시에서도 엿보인다.

시인의 수염에 대한 열망은 어른의 세계를 선망하는 아이를 연상시킨다. 마치 어른 흉내를 내는 치기 어린 행동 같다. 페니 마셜 감독의 코미디 영화 ‘빅(Big·1988년)’의 주인공인 열세 살 조시도 그랬다. 소년은 키가 작아서 놀이기구 탑승을 거부당하자, 놀이공원에 있는 소원을 들어준다는 기계에 빨리 크고 싶다고 말한다. 다음 날 갑자기 어른이 된 소년은 어른들의 세계에서 좌충우돌하며 그곳이 결코 생각 같지 않음을 확인하게 된다.

시에서도 영화 속 소년 같은 시인의 귀여운(?) 조바심이 느껴진다. 그 조바심은 6년 뒤 우연히 아침 햇살에 비친 흰 머리카락을 발견했을 때 절정에 도달한다. 시인은 또 한번 시의 재료를 얻었다고 환호작약했다. 하지만 다시 5년이 지난 뒤 생선 아가미뼈같이 거칠어진 자신의 수염을 어루만지며 과거의 일을 겸연쩍어한다. 벼슬길에 대한 고민 속에 빚쟁이들에게 시달리던 그에게 나이를 먹어간다는 것이 더 이상 즐거운 일만은 아니었던 것이다. 그래서 이렇게 될 줄 진작 알았다면 결코 기뻐하지 않았을 것이라고 철없던 시절을 후회하기도 했다(‘여성백·與成伯’).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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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염과 흰머리가 성숙의 징표가 되지 못하듯 나이가 든다고 다 어른이 되는 것 같지는 않다. ‘빅’에서 소년이 어설픈 어른 되기를 포기하고 다시 소년으로 돌아간 것처럼, 박지원은 외양을 따라가지 못하는 내면의 미성숙에 주목한 점이 인상에 남는다. 어쩌면 6척의 몸뚱이가 전혀 커지지 않았다는 말도 내면의 미성숙을 시사하는 것인지도 모른다.

거울 속 우리의 모습은 해마다 변해 간다. 이 시는 나이가 드는 것이 외면의 노화만이 아니라 내면의 성숙이기도 함을 일깨워 준다. 그래서 나이 먹는 것은 쉽지만 진정한 어른 되기란 어려운 법이다. 세상의 어른들이 나이를 앞세우기보다 자신을 돌아보아야 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임준철 고려대 한문학과 교수
#한시#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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