속풀이, 기운 없을때도 특효…한국인은 왜 뜨거운 국물에 집착할까

  • 동아일보
  • 입력 2020년 9월 22일 11시 44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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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시간 해외여행 할 때 간절히 생각하는 한국 음식은 무엇일까?’

음식 분야에 종사하는 이들과 이런 토론회를 가진 적이 있었다. 칼칼한 김치, 매콤달콤한 떡볶이, 진한 간장게장 등이 나왔다. 하지만 ‘한국인이 속풀이 할 때 가장 먼저 찾는 음식은?’으로 질문을 바꾸니 결론은 의외로 간단했다. 특히 서양 음식의 느글느글한 맛을 단숨에 제압하는 힘을 지닌 ‘입맛 향수병’ 특효약은 바로 넉넉한 양의 뜨끈한 국물이라는 것. 외국의 퍽퍽한 음식에 지쳐있다 숙소에서 끓인 라면의 국물 한 방울까지 소중하게 들이켰던 기억을 지닌 사람들이 대부분 동의했다.

뜨끈한 국물은 음식 사업을 할 때 적지 않은 어려움을 줄 때가 있다. 중년 남성이 대부분인 기업대표들을 위한 행사였는데, 그때 요청받은 식사 메뉴가 설렁탕이었다. 한우 사태와 양지로 나름 정성스럽게 탕을 준비했다. 특히 식었을 때도 느끼하지 않게끔 기름기 제거에 신경을 썼다. 그런데 외부 행사장에서 먹는 설렁탕 국물은 참석자들을 만족시킬 수가 없었다. 설렁탕은 펄펄 끓어야 하는데 왜 식었냐는 등 지금까지 먹어온 탕의 경험과 기준을 말하며 불만을 거세게 토로했다. 식사비까지 깎아 준 쓰라린 경험이었다.

우리 민족은 왜 이리 뜨거운 국물에 집착하는 걸까? 한국인은 오랫동안 고기 섭취도 국물로 해결했다. 기운이 없을 때는 서로 진한 국물을 권하는 것이 미덕이었다. 어릴 때 가족 중에 누군가 병이 나면 엄마는 큰 솥에 곰탕을 끓이기 시작했다. 부엌 옆방에서 맡는 그 냄새는 결코 좋지 않았다. 집안이 축축해지면서 누릿하고 비릿하기도 한 냄새가 마치 운동화가 삶아지는 것 같은 상상을 하게 했다. 어린 시절 혼자말로 ‘운동화국’이라 부르며 억지로 곰국을 먹었던 기억이 난다.

얼마 전 옛날 집안에 가득했던 사골 국물의 느낌을 만끽할 수 있는 곳을 서울 삼각지에서 찾아냈다. ‘와와소머리탕’이라는 상호가 리듬감 있다. 문을 열고 작은 식당에 들어서면 주방을 거쳐 테이블로 가야 된다. 주방이 훤히 보여 기다리는 재미가 있다. 어릴 적 맡았던 뼈를 우리는 고기국물 향의 기억이 되살아난다. 물론 이제는 냄새가 부담되지 않고 오히려 복닥복닥 살던 옛날을 그립게 만든다.

이곳의 노부부는 20년 훨씬 넘게 탕에 주력했다. 뽀얗고 심플한 사태 국물을 기본으로 탕에 들어가는 고기는 소머리를 삶아서 쓰고 있다. 가게 건너편 작은 창고에서 소머리를 손질하고 사태를 끓여 국물을 만든다. 소혀, 볼살 등 소머리고기가 담긴 뽀얀 국물에 직접 담근 파김치와 배추김치 한쪽이면 단순한 행복에 빠진다. 뜨끈한 소머리탕을 먹다보니 미지근한 설렁탕에 분노했던 옛 고객들이 절로 이해됐다.

이윤화 음식평론가·‘대한민국을 이끄는 외식 트렌드’ 저자 yunaly@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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