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아플래시100]“어머니, 이 추위에…” 3·1운동 6인의 애끊는 옥중 편지

  • 동아일보
  • 입력 2020년 6월 2일 11시 4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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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21년 3월 1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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앞서 ‘“3·1운동 48인 재판 불가” 일본인 소신 판사 보복 좌천’ 글에서 3·1운동 지도자들의 1심 재판이 중단된 사정을 전해드렸습니다. 그렇다고 독립운동 지도자들을 풀어줄 일제가 아니었죠. 1심 없는 2심으로 직행했습니다. 경성복심재판부는 1920년 10월 30일 합계 60년의 징역형을 선고했죠. 48인은 상고를 포기해 형은 그대로 확정됐습니다.

48인은 감옥 담장에 가로막혀 부모 형제 자식과 생이별했습니다. 감옥생활은 갇힌 사람만 옥죄는 것이 아닙니다. 가족과 친지들도 감옥 밖에서 옥살이를 합니다. 아들과 남편 아버지의 얼굴을 한 번이라도 더 보려고 면회를 신청하기도 하고 먹을 것과 입을 것, 돈을 들여보내 조금이라도 나은 감옥생활이 되도록 애를 씁니다. 이를 ‘옥바라지’라고 하지요.

제3자는 갇힌 사람과 그들을 옥바라지하는 가족의 마음을 쉽게 헤아릴 수 없습니다. 그들이 감옥이라는 특수한 곳에서 만나고 헤어지기 때문입니다. 동아일보는 1921년 3월 1일자에 48인 중 6인이 가족에게 보낸 편지를 입수해 소개했습니다. 감옥 밖에서는 그저 아무 걱정 말고 제 한 몸 잘 건사하기만을 바라지요. 감옥 안에서는 염려하지 말라고 편지를 쓰지만 가족을 향한 안타까운 마음까지 숨길 수는 없는 법입니다.



천도교 도사인 오세창은 중국어 역관 출신이어서 그런지 한문으로 편지를 썼습니다. 한국고전번역원의 도움으로 뜻을 풀어보니 대범한 자세가 물씬 풍깁니다. ‘조금도 가슴이 막힌 것이 없고 세상과 더불어 다투고 싶지 않다’며 상고를 포기한 심정을 털어놓았죠. 염려하지도, 슬퍼하지도 말라고 하면서 ‘인생이 원래 이러하니 붓을 던지고 한번 웃는다’는 대목에서는 초탈한 경지를 엿볼 수 있습니다. 그의 부친 오경석은 역시 역관으로 개화사상의 시조였죠.

같은 천도교 도사인 권동진의 편지에서는 환자의 분위기가 묻어납니다. 경성감옥으로 온 뒤 ‘병이 다시 나서 크게 어려운데 추위 때문에 몸이 쇠약해졌다’고 상태를 알렸죠. 더 길게 쓰면 걱정할까봐 읽을 책을 넣어달라는 부탁만 했습니다. 동아일보는 글씨가 힘이 없고 사연이 분명하지 못한 것을 보더라도 아픈 상태인 것을 알겠다고 전했습니다.



독립선언서를 쓴 최남선은 어머니를 그리워하는 마음을 담았습니다. 면회를 마치고 떠난 어머니에게 ‘입춘 추위의 찬바람에 잘 돌아가셨는지 돌아서시는 옷자락이 눈에서 사라지지 않습니다’라고 썼죠. 어머니는 낡은 죄수복 차림의 아들 모습에 돌아서서 눈물을 흘리셨을 겁니다. 섣달그믐에 부친 편지가 새해 아침에 제대로 들어갈지 모르겠다며 제때 새해 문안도 드리지 못하는 불효자식을 용서해 달라고도 했죠. 더구나 최남선은 어린 조카딸의 죽음을 전해 들었습니다. 지난밤 보채는 조카딸 아이를 달래는 꿈을 꾸었다며 슬픔을 누르지 못했죠.

보성고등보통학교 교장 최린은 부인에게 애틋한 정을 표현했습니다. ‘지난번 면회시간이 너무 짧았던 데다 슬픈 마음 때문에 안 보느니만 했다’고 한 것이죠. 고향의 늙은 부모께 아들은 잘 지낸다고 편지해달라고 하는 대목에서는 그리움과 송구함이 함께 전해집니다.



기독교 장로 박희도의 편지는 동생에게 용서를 구하는 내용입니다. 3년 전 동생이 아플 때 3·1운동에 가세해 곁을 떠났고 부모 봉양까지 떠넘겼다며 ‘목석인들 유감이 없겠느냐’고 미안해했죠. 자신이 없는 사이에 동생이 결혼까지 했으니 미안함은 곱절이 되었을 법합니다.

기독교 목사 오화영은 딸에게 편지를 써 아내가 마음 편히 지내게 하라고 당부합니다. 그런데 돈 1원을 더 보내달라고 하죠. 그때 1원이면 지금 5만 원입니다. 그것도 형편 닿는 대로 해달라는 거였죠. 형편이 어려운 가족에게 부담을 주기 싫은 마음이 그대로 다가옵니다.

이들의 편지에는 인간의 약한 모습이 드문드문 드러납니다. 어쩔 수 없는 일입니다. 일제가 이들을 감옥에 가두면서 노린 점이기도 하겠죠. 세상과 단절시켜 독립 의지를 꺾어놓겠다는 심산 말입니다. 하지만 이들은 굴복하지 않았습니다. 출옥할 때까지 당당하게 스스로를 지켜나갔습니다.

이진 기자 leej@donga.com

과거 기사의 원문과 현대문은 '동아플래시100' 사이트(https://www.donga.com/news/donga100)에서 볼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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