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학생도, 할머니도 거리로…4·19 60년, 잊혀진 혁명의 주역들

  • 동아일보
  • 입력 2020년 4월 17일 16시 32분


성명 문체용. 1960년 당시 35세 남성. 주소 경남 마산시 상남동. 이름은 자료 상 한글과 한자가 일치하지 않고, ‘문○영(文○英)’일 가능성도 있다. 그는 1960년 3월 15일 마산에서 3·15부정선거에 항의하는 시위에 참가했다가 중성동에서 경찰의 총에 맞아 왼쪽 다리가 골절됐다. 학력 란은 비어있다. 부친의 직업은 농업, 경제 상태는 하(下). 장래 희망은 “부자가 되는 것”이라고 했고, 경남도립마산병원에 입원한 심정은 “앞길을 생각할 때 한 없이 슬프다”고 했다. 이는 ‘민주주의를 되찾아 뿌듯하다’처럼 시위 참여 동기나 정국 전망 관련 답변을 한 학생들의 답과 차이가 있다.

문 씨는 ‘연세대 4월혁명연구반 수집자료(4·19 혁명 참여자 구술 조사서)’ 가운데 ‘부상자 실태조사서’에 등장한다. 이 자료는 1960년 연세대 정치외교학과 4학년이던 김달중 안병준 씨(나중에 연세대 교수를 지냄)가 그해 4월 23일경부터 7월까지 당사자들을 면담해 작성한 것이다. 자료 소장처인 연세대 박물관의 이원규 학예팀 아키비스트는 “당대 생산돼 시간의 경과에 따른 왜곡이 적은 1차 자료”라고 설명했다.

문 씨의 프로필은 흔히 떠올리는 4·19혁명 주역의 이미지와는 사뭇 다르다. 그가 그저 시위에 휩쓸렸던 것도 아니다. 그는 데모할 때 ‘부정선거 다시 하라’ ‘무장경관 물러가라’는 구호를 외쳤을 뿐 아니라 (경찰서 등을) ‘부수지 말자’는 주장을 했다고 분명히 언급했다.

부정선거와 독재에 맞서 피로 민주주의를 지킨 4·19혁명이 올해 60주년을 맞았다. 문 씨처럼 혁명의 주역임에도 기억에서 점차 사라져 간 이들이 있는 것은 아닌지 살펴봤다.

연구자들은 4·19혁명은 광범위한 계층이 참여했음에도 학생, 그중에서도 특히 대학생과 교수를 비롯한 엘리트 중심으로 조명된 경향이 없지 않다고 지적한다. 식자층이 혁명의 한 주역임은 틀림없는 사실이지만 일기나 수기 등 사료가 될 수 있는 기록을 일상적으로 남겼기에 그들이 기억되기가 더 쉬웠다는 얘기다.

‘연세대 4월혁명연구반’ 자료에는 파출소에 방화했다는 누명을 씌우려는 경찰의 고문을 받은 박세현 씨(당시 22세)의 조사서도 포함돼 있다. 그의 직업은 ‘운전수’. 자료를 보면 박 씨는 다친 몸으로 6, 7명의 식구를 부양해야 한다는 사실에 근심이 가득했던 것으로 보인다. 그럼에도 그는 “본인의 불구된 것은 아깝지 않으나, 제2공화국을 바로잡으며 올바른 민주주의 역사가 길이길이 영원토록 나가도록 비나이다”라고 밝혔다.

노인 시위대 역시 거의 잊힌 혁명의 주역들이다. 당시 사진에는 1960년 4월 25일 할머니 시위대가 마산시청 앞에서 “죽은 학생 책임지고 리 대통령 물러가라”고 쓴 플래카드와 함께 목소리를 높이는 모습이 생생하다. 홍석률 성신여대 사학과 교수는 저서 ‘민주주의 잔혹사’에서 “이승만 하야(4월 26일) 전 플래카드와 구호로 대통령의 실명을 거론하며 퇴진을 요구하는 건 보통의 용기와 결단이 아니었다”며 “당시 할아버지 할머니들이 벌인 시위는 시민들이 합세해 수만 명이 모인 대규모로 번졌지만 관련 책에서도 이에 대한 언급을 찾기 어렵다”고 했다.

4·19혁명의 주체를 오랫동안 ‘젊은 사자들’로 표현한 것 역시 문제였다는 분석이다. ‘젊은 사자들’은 1958년 개봉해 인기를 모은 영화 제목으로, 혁명 직후 각종 간행물에서 주로 대학생들을 호명하는 관용구가 됐다. 그러나 학계에서는 수사자를 떠올리게 하는 이 표상은 혁명의 주체였던 여학생과 주부, 빈민 여성을 배제하고 있다는 지적이 나왔다.

오제연 성균관대 사학과 교수에 따르면 여고생들도 학도호국단 간부 네트워크를 중심으로 학교별로 조직적인 시위에 나섰다. 4·19혁명의 서막을 연 2·28 대구 의거 당시에도 경북여고, 대구여고 학생들이 궐기했으며, 3·15 부정선거 뒤에도 진해여고(진해) 데레사여고(부산) 성지여고 마산여고 마산제일여고(마산) 청주여고(청주)를 비롯해 수많은 여학생들이 시위를 벌였다. 여대생들도 다수 시위에 참여했다. 오 교수는 “남자 대학생 중심의 4·19혁명 상(像)은 여성의 역할을 주변적인 것으로 만든다”고 말했다.

또 고려대생이 4·18시위를 벌이기 전 4·19혁명의 초기 주인공은 고교생이었다고 볼 수 있다. 고교생들은 그해 2월 말부터 계획적인 시위를 지속해 벌였으며, 혁명이 절정에 이른 순간에도 일선에서 피를 흘렸다. 4·19 당시 서울 동성고 3학년으로 경무대(청와대) 앞에서 왼팔에 총을 맞은 강대기 씨는 “우리들은 자유 민주 정의를 위해 피를 흘렸다. 어떤 반대급부도 요구하지 않고 조국과 민족을 위해 나선 것 뿐이었다”(‘동성의 4·19혁명’에서)고 회고했다. 서울 경신고 2학년이던 권무웅 씨(작고)는 19일 밤 시위대와 차를 타고 경기 의정부로 가던 도중 창동에서 복부에 총을 맞아 중상을 입었다. 그럼에도 그는 병원에서 “이제 우리가 학생으로서 원하던 것은 다 성취된 셈”이라고 했다.(연세대 4월혁명조사반 자료)

4·19혁명은 증언할 수 있는 당사자들이 있는 만큼 진상을 폭넓게 조명하려는 노력이 계속돼야 한다는 지적이 나온다. 실제 몇몇이 학교 시위를 주도한 것으로 왜곡된 기록을 정정한 특정 학교의 4·19혁명 백서가 최근에도 새로 나오기도 했다. ‘가짜 유공자’ ‘가짜 부상자’ 논란 역시 말끔히 정리됐다고 보기 어렵다.

한편 연세대 박물관은 신종 코로나 바이러스 감염증(코로나19) 사태가 잦아드는 대로 서울 서대문구 박물관에서 ‘연세대 4월혁명연구반 수집자료’ 등을 소개하는 전시 ‘청년학생의 힘!―정의의 깃발, 자유의 함성, 민주의 길’의 문을 열 예정이다.

조종엽 기자 jjj@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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