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의 향기]귀여운 자동차, 여성의 ‘자유’에 시동 걸다

  • 동아일보
  • 입력 2020년 3월 7일 03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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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0가지 물건으로 다시 쓰는 여성 세계사/매기 앤드루스, 재니스 로마스 지음·홍승원 옮김/456쪽·1만9800원·웅진지식하우스

‘위대한 작은 차들’로 홍보한 미니(MINI)의 광고 포스터. 수에즈 운하 운영권을 둘러싸고 이집트와 영국 프랑스가 충돌한 수에즈 위기의 여파로 1958년 5월 탄생한 이 차는 연료소비효율을 높여 제작됐다. 네 명의 성인이 탑승하기 충분한 크기였다. 안전벨트나 라디오는 없었다. 웅진지식하우스 제공
‘위대한 작은 차들’로 홍보한 미니(MINI)의 광고 포스터. 수에즈 운하 운영권을 둘러싸고 이집트와 영국 프랑스가 충돌한 수에즈 위기의 여파로 1958년 5월 탄생한 이 차는 연료소비효율을 높여 제작됐다. 네 명의 성인이 탑승하기 충분한 크기였다. 안전벨트나 라디오는 없었다. 웅진지식하우스 제공
캐나다 출신의 연극계 거장 로베르 르파주는 가족사를 다룬 자신의 작품에 대해 “소문자 h로 된 역사(history)를 탐구함으로써 대문자 H로 시작하는 역사(History)를 더 잘 이해할 수 있다”고 했다. ‘정설’로 여겨지는 하나의 ‘History’ 안에 무수히 많은 인간, 사건들의 ‘history’가 담겨 있고, 이를 조명할 때 비로소 진정한 ‘History’에 도달한다는 의미다.

3월 8일 세계 여성의 날을 앞두고 ‘여성들의 역사(Herstory)’를 돌아보는 책이 출간됐다. 고대부터 현대까지 남성 서사로 덧칠된 역사(History) 안에 감춰졌던 ‘2등 시민’ 여성들의 목소리를 100가지 물건을 통해 되짚는다.

영국 우스터대와 버밍엄대에서 여성의 사회적 역할을 연구한 두 저자는 역사 속 여성의 삶은 어떻게 만들어지고 재정립됐는지에 초점을 맞춰 집필했다. 이들이 역사 속에서 끄집어 낸 100가지 물건은 상징물, 그림, 기록, 기구, 유품 등으로 다양하다. 이 물건들을 여성의 몸, 사회적 역할 변화, 미의식과 소통, 정치 등 총 8가지 분야로 나눴다. 각 물건에 얽힌 짤막한 소개와 함께 물건의 역사적 의의가 술술 읽힌다.

전반부에는 남성이 여성을 타자화하고 억압한 사례들을 소개한다. 16세기 스코틀랜드에서 사용한 ‘잔소리꾼 굴레’는 여성의 입에 재갈을 물리듯 채우는 도구다. 가부장적인 규범에 맞지 않게 ‘불손한’ 말을 하는 여성의 입에 채웠다. 물을 마실 수도 없게 혀를 고정시킨다. 오늘날 여성 억압의 상징물로 여겨지는 코르셋은 기원전 2000년까지 거슬러 올라간다. 당대 용도는 정확히 확인할 수 없으나 15세기까지만 해도 코르셋은 속옷이 아니었다. 뻣뻣한 소재로 만들어져 일을 하기 불편했고, 노동하지 않는 상류층 여성의 기품을 상징하는 의류였다. 이후 극도로 졸라매는 방식이 개발되며 건강을 해치는 수준이 됐다. 훗날 특정 물건을 통해 성적 쾌감을 얻는 페티시(fetish)의 대명사가 되기도 했다.

18, 19세기 영국에서는 대중적으로 아내를 사고파는 관행이 있었다. 심지어 공공장소에서 판매가 이뤄지거나 광고 포스터로 제작돼 신문에 실리기도 했다. 아내가 거부권을 행사할 수도 있었지만, 판매가 성사되면 변호사를 통해 영수증을 작성했다. 가난한 계층에게는 아내 판매가 일종의 이혼이었다. 대부분의 여성에게는 이혼을 선택할 권리가 없었다. 1700년부터 1857년까지 남편과의 이혼에 성공한 여성은 여덟 명뿐이었다.

책은 여성 억압에만 머물지 않는다. 여성이 스스로 권리를 어떻게 쟁취했으며 여성사의 의의도 강조한다. 자동차 ‘미니(MINI)’는 여성이 가정 공간을 벗어나게 한 혁신이다. 남성 전유물이던 자동차가 더 작고 저렴하게 보급되며 여성도 이동의 자유가 생겼다. 1990년 잡지 ‘오토카’에서 100인의 전문가도 20세기 가장 의미 있는 차로 미니를 택했다. 미니의 성공에 자극받은 다른 자동차 회사들도 잇따라 여성 소비자에게 눈을 돌렸다.

여성 운전자가 더이상 낯설지 않은 오늘날 ‘여성의 공간지각력이 부족하다’는 통설을 반박하는 과학적 연구가 있음에도 여성 운전자에 대한 농담과 비판은 여전하다. 독일 오스트리아 스위스 등 나라에서는 여성을 위해 ‘특별하게’ 넓은 주차공간을 제공한다.

김기윤 기자 pep@donga.com
#100가지 물건으로 다시 쓰는 여성 세계사#매기 앤드루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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