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계, 이름을 가지다

  • 동아일보
  • 입력 2019년 12월 20일 03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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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승현의 워치앤톡]

롤렉스(Rolex)의 창업자 한스 빌스도르프는 20세기 초 브랜드 론칭을 앞두고 깊은 고민에 빠졌다. 론칭 직전까지 그를 괴롭힌 건 신제품의 기능이나 디자인이 아닌 브랜드 ‘이름’이었다. 누구나 쉽게 발음할 수 있으면서 고급스러운 이름을 만들고 싶었던 한스 빌스도르프는 알파벳 5개를 조합해 며칠간 수백 개의 단어를 만들고 또 만들었다. 그러던 어느 날 마차를 타고 영국 런던 시내를 지나던 그는 어디선가 들려온 ‘롤렉스’라는 소리에 무릎을 쳤다.(말의 울음소리가 롤렉스처럼 들렸다는 설도 있음.) 대단히 거창할 것 같았던 롤렉스의 유래는 생각보다 싱겁지만, 세기가 흐른 지금 대부분이 롤렉스를 알고 발음한다는 점에서 결과적으로 성공한 작명이 됐다.

■ 브랜드가 된 창립자들

이름은 브랜드의 첫인상이다. 모델마다 레퍼런스 넘버(Reference Number)나 컬렉션 이름이 따로 있지만 정작 사람들의 입에 오르내리는 건 브랜드 이름이다.

롤렉스는 예외지만 수백 년의 역사를 가진 시계 브랜드는 대부분 창립자의 이름을 간판으로 내세웠다. 브라이틀링(레옹 브라이틀링), 파네라이(조반니 파네라이), 태그호이어(에드워드 호이어), 까르띠에(루이 프랑스아 카르티에) 등 우리가 잘 아는 브랜드 상당수가 창립자의 이름을 그대로 땄다. 로저드뷔(로저 드뷔)나 리처드 밀(리처드 밀) 역시 마찬가지다. 시계 브랜드뿐 아니라 구찌(구치오 구치)나 샤넬(가브리엘 샤넬) 같은 세계적 패션 브랜드도 같은 공식을 따랐다.

동업자가 있는 경우에는 둘의 이름을 함께 썼다. 줄스 루이 오데마와 에드워드 오귀스트 피게가 함께 만든 브랜드의 이름은 오데마 피게로 지었다. 폴란드 귀족인 앙투안 드 파텍과 시계장인 프랑수아 차펙이 함께 창업한 ‘파텍차텍’은 이후 동업자가 캐비노티에 장 아드리앙 필리프으로 바뀌면서 지금의 ‘파텍필립’이 됐다. 시계 전문 브랜드는 아니지만 주얼리 브랜드 반 클리프 아펠의 이름에는 한 커플의 러브스토리가 담겼다. 이 브랜드의 창립자 에스텔 아펠과 알프레드 반 클리프는 부부로 두 사람이 결혼하면서 브랜드의 역사도 함께 시작됐다. 연인의 이름이 그대로 담겨서인지 브랜드 철학인 ‘진실된 사랑’이 더 잘 와 닿는 듯하다.

■ 이름 속에 담겨진 장인정신

창립자의 이름과 전혀 상관없는 브랜드명도 있다. 롤렉스의 창립자 한스 빌스도르프가 만든 두 번째 브랜드 튜더의 이름에는 영국 역사가 담겨져 있다. 런던에서 처음 시계 사업을 시작한 빌스도르프는 대영제국의 틀을 세웠던 튜더 왕가의 이름을 브랜드 이름에 그대로 반영했다.

때론 특별한 의미나 브랜드가 추구하는 방향을 이름에 담기도 했다. 일본 시계 브랜드 세이코는 일본어로 ‘정교한(exquisite)’이란 뜻으로 브랜드 기술력을 강조했다. 오메가(Ω)는 그리스 알파벳의 마지막 글자로 ‘끝’ 또는 ‘최후’라는 의미를 담고 있다. 창립자 루이 브란트가 시계 기술을 완성했다는 의미로 브랜드에 대한 자부심이 강하게 묻어난다. 최근 국내에서 예물시계로 인기를 끌고 있는 IWC 샤프하우젠은 ‘국제 시계 회사(International Watch Company)’의 약자로 다른 브랜드에 비해 단순하고 직설적이다. 샤프하우젠은 스위스 북부 도시로 IWC가 처음 설립된 곳이다. 위블로(HUBLOT)는 배의 동그란 창문을 닮은 제품 디자인을 브랜드 이름에 반영했다. 프랑스어로 위블로는 ‘배의 창문(현창)’을 뜻한다.

이상하게도 요즘은 창립자의 이름을 붙인 브랜드를 찾아보기 어렵다. 이름은 그럴싸하지만 정작 제품은 기대에 못 미치는 경우가 많다. 옛 창립자들이 간판에 과감히 자신의 이름을 내건 이유는 자기 과시보다 제품에 대한 자부심과 책임감에서 비롯됐다. 하루 수백 개의 브랜드가 생겨나고 사라지는 지금 시대에 필요한 건 세련된 이름이 아닌 바로 옛 창립자들의 장인정신이다.

강승현 기자 byhuman@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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