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슴에 있는 의지 잃지 말자, 우리도 대한사람이니 분기하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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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입력 2019년 12월 7일 03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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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 3·1운동 임정 100년, 2020 동아일보 창간 100년]
3·1운동 100년 역사의 현장 2부 <제83화> 전남 곡성-담양

전남
 곡성군 3·1공원(봉황대)에 조성된 ‘곡성3·1운동기념탑’(가운데). 경내에는 곡성 만세운동을 주도한 신태윤 선생의 
동상(왼쪽)이 세워져 있고, 뒤쪽 언덕배기에는 1931년에 중창한 단군전(등록문화재)이 우뚝 서 있다. 곡성=박영철 기자 
skyblue@donga.com
전남 곡성군 3·1공원(봉황대)에 조성된 ‘곡성3·1운동기념탑’(가운데). 경내에는 곡성 만세운동을 주도한 신태윤 선생의 동상(왼쪽)이 세워져 있고, 뒤쪽 언덕배기에는 1931년에 중창한 단군전(등록문화재)이 우뚝 서 있다. 곡성=박영철 기자 skyblue@donga.com
“조선의 현 상황이 유유히 천렵이나 즐기고 있을 때가 아니다. 이미 남원, 담양의 각 보통학교 생도 등은 솔선하여 조선 독립을 부르짖고 있는데, 곡성만 아무것도 하지 않고 평온한 것은 너희들에게 애국심이 없기 때문이다. 썩어빠진 곡성 청년들은 이러한 용기가 없을 것이다.”(신태윤, 정내성 판결문)

1919년 3월 24일 전남 곡성군 곡성보통학교 훈도(교사) 신태윤(1884∼1961)은 학교 숙직실 뒤쪽 냇가에서 물고기를 잡아 끓여 먹던 졸업생과 재학생들에게 이같이 꾸짖었다.

실제로 당시 상황은 그만큼 긴박했다. 보름 전인 3월 10일 광주에서 일어난 독립만세 시위가 이웃한 담양, 나주, 장성 등지로 들불처럼 확산됐고, 밤을 이용한 산상 봉화 시위도 곳곳에서 전개되고 있었다. 스승의 말에 자극받은 정내성, 김중호, 양성만, 박수창, 김경석, 김기섭, 김태수 등 청년들은 “곡성 생도들도 그 정도의 일은 할 수 있다”며 만세 운동에 앞장서기로 한다.

이튿날인 25일 신태윤의 애제자인 정내성이 ‘우리 곡성의 제군이여! 가슴에 있는 의지를 잃지 말자. 우리도 대한 사람이니 이 기회를 놓치지 말고 분기하라! 우리들도 제군과 함께 궐기할 것이다’라는 내용의 격문 20여 장을 작성한다. 그는 이어 26일 자신의 집에서 만세운동을 위한 비밀 모임을 연다. 이 자리에 참석한 신태윤은 “독립운동 계획은 비밀리에 철저히 세워야 한다. 다음 장날에 거사하는 것이 좋겠다”고 거사 계획을 밝힌다. 이에 신태윤의 제자들은 태극기를 제작하는 준비 작업에 나섰다.

신태윤은 3·1운동을 독려하는 동시에 역사의식도 강조했다. 그는 담양보통학교 졸업생 김중호에게 조선 개국 이래의 역사를 간략히 정리한 ‘조선역사’를 건넨 뒤 “그대들이 조선을 독립시키고자 한다면 먼저 조선의 역사를 알아야 한다. 우선 이것을 서당에 가져다 두면 내가 가서 가르쳐 주겠다”고 말한다. 신태윤은 이전부터 수업이 끝난 뒤 별도로 마련된 서당에서 원하는 학생과 청년들에게 민족의식을 길러주는 역사교육을 진행해왔다. 학교에서는 조선 역사를 가르칠 수 없었기 때문이다.

마침내 3월 29일 곡성 장날 신태윤은 태극기를 들고 거사를 시작했다. 정내성 등 곡성보통학교 졸업생과 재학생 수십 명이 태극기를 들고 스승의 뒤를 따랐다. 학생 시위대가 “대한독립만세”를 소리 높이 외치며 시장을 돌자 장에 모인 주민들이 따라붙었다. 시위 규모가 커지자 놀란 일제 경찰은 무력 진압에 나섰고 신태윤과 정내성, 박수창, 김경석, 김중호 등은 현장에서 체포됐다.

곡성의 만세운동은 일제의 삼엄한 감시망 때문에 몇 차례의 산발적 시위로 끝나고 만다. 하지만 곡성 사람들은 항일의병 활동의 중심지로서 많은 희생을 치렀던 과거를 딛고 일어나 만세운동을 펼침으로써 절의지향(節義之鄕·충절의 고향)의 명성을 이어갔다.


○ 조상 사당으로 위장한 단군전


이달 2일 곡성 3·1운동이 벌어졌던 현장을 찾았다. 3·1운동을 주도한 곡성보통학교(현 천주교곡성성당 자리)와 시위 장소인 옛 장터의 흔적은 사라지고 없었다. 다만 곡성군 곡성읍 봉황대에 조성된 몇 개의 기념물이 그날의 역사를 간직할 뿐이었다.

3·1공원으로도 불리는 봉황대에는 곡성 만세운동을 기념하는 ‘곡성3·1운동기념탑’과 신태윤의 독립운동을 기리는 백당기념관, 일제강점기에 설립된 단군전 등 건축물이 삼각형 구도로 자리 잡고 있다.

백당 신태윤(왼쪽에서 두 번째)이 1914년 곡성군 삼인동에 초가로 조성한 단군묘. 단군 위패를 모신 직후 봉심(奉審) 의식에 참여한 이들과 함께 촬영한 기념사진이다. 곡성 단군전 제공
백당 신태윤(왼쪽에서 두 번째)이 1914년 곡성군 삼인동에 초가로 조성한 단군묘. 단군 위패를 모신 직후 봉심(奉審) 의식에 참여한 이들과 함께 촬영한 기념사진이다. 곡성 단군전 제공
봉황대를 안내한 김학근 국사편찬위원회 사료조사위원(84)은 “백당(신태윤의 호)은 3·1만세운동 당시 곡성 사람들의 독립 정신에 불을 지피는 데 큰 역할을 했기 때문에 3·1운동 기념탑과 함께 그의 업적을 기리는 기념관을 조성하게 됐다”고 설명했다. 이어 그는 단군전에 대해서 “백당은 1910년 나라를 잃게 되자 국운과 민족정기를 바로잡아야 한다는 생각으로 단군전을 조성하는 등 한평생 단군 숭모운동을 벌여왔다”고 덧붙였다. 1950년대에 신태윤으로부터 직접 가르침을 받았던 김 위원은 “백당은 광복 후에도 ‘우리의 국조(國祖) 단군을 모시고 애국, 애족, 애향 운동을 해야 한다’면서 늘 주체 의식을 강조했다”고 밝혔다.

민족정기와 바른 역사를 주창한 신태윤이 단군과 인연을 맺게 된 것은 경성 한성사범학교에 재학(1906∼1908년)하던 때다. 그는 당시 주시경, 어윤적, 이능화 등 애국지사들의 민족계몽 교육에 큰 감명을 받고, 단군을 받드는 대종교를 창시한 나철과 인연을 맺는다. 이현익의 ‘대종교인과 독립운동연원’에는 “백당 신태윤 선생은 홍암 대종사(나철)의 유훈을 받고 국내 비밀사원으로 활동했다”고 기록돼 있다.

대종교 비밀결사대원이었던 신태윤은 곡성보통학교 교사로 근무하던 1914년 학교 인근인 삼인동에 초가로 단군묘(檀君廟)를 세운다. 선조의 사당을 짓는다고 했지만 실제로는 단군의 위패인 ‘단조홍성제(檀祖弘聖帝)’를 모셨다. 당시는 일제가 반일 및 불온한 사상을 부추긴다는 이유로 단군 신앙을 철저히 탄압하던 시대였다. 현재의 봉황대 단군전은 신태윤이 3·1운동으로 징역살이를 하다가 출옥한 뒤 삼인동의 단군사당을 옮겨와 1931년에 다시 세운 것이다.

백당 신태윤이 저술한 ‘정사’ ‘고려사절요’ 등이 전시된 백당기념관. 1950년대 백당의 가르침을 받은 김학근 국사편찬위원회 사료조사위원이 백당의 역사관에 대해 설명하고 있다.  담양=박영철 기자 skyblue@donga.com
백당 신태윤이 저술한 ‘정사’ ‘고려사절요’ 등이 전시된 백당기념관. 1950년대 백당의 가르침을 받은 김학근 국사편찬위원회 사료조사위원이 백당의 역사관에 대해 설명하고 있다. 담양=박영철 기자 skyblue@donga.com
봉황대 단군전은 남한지역의 단군사당으로는 유일하게 등록문화재(제228호·2005년)로 지정돼 있다. 김 위원은 “현재도 백당 선생의 뜻을 받들어 곡성지역 유림들 중심으로 매년 어천절(3월 15일)과 개천절(10월 3일)에 춘추봉제(春秋奉祭)를 올리고 있다”면서 “국내에서 단군과 역사 정신을 기치로 삼아 3·1만세운동을 주도한 이는 백당이 유일할 것”이라고 말했다.


○ ‘황새가 빼앗은 학의 둥지’

신태윤의 독립운동은 곡성과 이웃한 담양에도 영향을 미쳤다. 그가 3월 29일 곡성 만세운동으로 체포돼 광주로 이송될 때였다. 곡성군 옥과면 주민들뿐만 아니라 담양군 창평면 사람들이 도로에 나와 울부짖으며 애통해할 정도로 신태윤은 곡성과 담양군민들의 지지를 받았다. 그는 감옥에서 출소한 뒤 1928년 담양의 지곡학교에서 근무하며 지곡리 만수동에 단군전을 세우는 등 민족의식을 고취하는 활동을 계속했다.

담양군 창평초등학교의 연원을 밝혀주는 ‘창흥의숙’ 표석. 1906년에 설립된 창흥의숙은 신태윤 선생이 신학문에 눈을 뜬 곳이다. 담양=박영철 기자 skyblue@donga.com
담양군 창평초등학교의 연원을 밝혀주는 ‘창흥의숙’ 표석. 1906년에 설립된 창흥의숙은 신태윤 선생이 신학문에 눈을 뜬 곳이다. 담양=박영철 기자 skyblue@donga.com
담양이 고향인 신태윤은 어린 시절 담양군 창평면 창흥의숙(창흥학교·창평공립보통학교·현재는 창평초등학교)을 다니며 신학문을 접했다. 또 신학문과 민족 계몽교육에 일찌감치 눈을 뜬 담양은 곡성보다 먼저 3·1만세운동이 일어난 곳이었다.

담양에서는 10대 후반에서 20대 초반의 청년과 보통학교 학생들이 만세운동을 주도했다. 담양보통학교 학생 임기정은 김길호(4학년생) 김홍섭(3학년생) 등과 함께 학생들을 모아 만세운동을 벌이기로 하고 3월 17일 조선인을 학으로, 일본인을 황새에 빗댄 격문을 썼다.

‘황새가 날아와 학의 둥지를 빼앗아 1700여만의 학들이 비탄에 잠겼으나 하늘은 이를 그대로 방임하지 않을 것이다. 언젠가는 황새를 쫓아낼 기회가 있을 것이다.’(정기환 외 판결문)

임기정은 격문 끝에 붉은 물감으로 ‘금일 시장에서 호만세(呼萬歲·만세를 외치자)’라는 글귀를 넣었다. 거사일인 담양읍 장날(3월 18일)이 밝았다. 그런데 이날 오전 5시경 담양시장 십자로 다리 밑에 숨겨둔 태극기 150장이 발각됐다. 만세운동 주도자들은 담양 헌병분견대에 체포돼 시위 자체가 물거품이 돼버릴 상황에까지 처했다. 하지만 담양 청년과 학생들은 주저하지 않았다. 김길호, 김홍섭 등은 그대로 시장으로 뛰쳐나가 만세를 외쳤다. 수백 명의 시위 군중이 그 뒤를 따랐고, 시내를 행진했다.

담양의 만세운동 열기는 이듬해인 1920년에도 이어졌다. 그해 1월 창평면에서 한익수(16세) 조보근(15세) 등이 10여 명을 모아 만세운동을 벌이기로 했다. 특히 신태윤이 공부했던 창평보통학교(이전 창흥의숙)의 후배인 한익수는 15명으로 구성된 창평소년회 회장을 맡아 만세운동을 주도했다. 1920년 1월 23일 이들은 태극기를 앞세우고 ‘대한독립가’를 합창하며 창평장터와 창평리 신작로를 행진했다. 이들은 조선 독립만세를 외쳐 독립사상을 고취하고 민심을 동요케 하여 독립의 기세를 올려야만 외국으로부터 독립을 승인받을 수 있다고 판단해 열렬히 독립만세를 외쳤다.(한익수 등 판결문)

주민들은 이들의 뒤를 따랐다. 1919년의 3·1만세운동 1년 후, 시위를 주도한 어린 소년들의 기개는 일경도 혀를 내두를 정도로 드높았다.

곡성·담양=안영배 논설위원 ojong@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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