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근배의 神品名詩]그날이 오면

  • 동아일보
  • 입력 2016년 3월 2일 03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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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날이 오면―심훈(1901∼1936)

그날이 오면 그날이 오며는
삼각산이 일어나 더덩실 춤이라도 추고
한강물이 뒤집혀 용솟음칠 그 날이,
이 목숨이 끊지기 전에 와 주기만 하량이면,
나는 밤하늘에 날으는 까마귀와 같이
종로의 인경人磬을 머리로 드리받아 올리오리다
두개골은 깨어져 산산 조각이 나도
기뻐서 죽사오매 오히려 무슨 한이 남으오리까.

그날이 와서 오오 그날이 와서
육조六曹 앞 넓은 길을 울며 뛰며 딩굴어도
그래도 넘치는 기쁨에 가슴이 미어질 듯하거든
드는 칼로 이 몸의 가죽이라도 벗겨서
커다란 북을 만들어 둘쳐 메고는
여러분의 행렬에 앞장을 서오리다,
우렁찬 그 소리를 한 번이라도 듣기만 하면
그 자리에 꺼꾸러져도 눈을 감겠소이다.


들리는가. 97년 전 바로 어제, 나라 빼앗겨 일제의 사슬에 묶인 채 때를 기다리던 젊은 청년학도들이 탑골공원에서 독립선언서를 읽고 목이 터져라 외치던 독립만세! 그 함성을, 그로부터 삼천리 방방곡곡 태극기를 손에 들고 밀려나와 적들의 총칼 앞에서 쓰러지며 쏟아내던 그 절규를! 하늘을 울리고 땅을 흔들던 그 소리를 귀 기울여 듣고 있는가.

1919년 3월 1일 오후 3시 민족 대표 33인 중 29인이 인사동 태화관에 모여 독립선언을 하고 4시에 일경에 연행된다. 한편 탑골공원에서 오후 2시부터 기다리던 청년학도들은 3시가 넘자 경신학교 출신 정재용이 팔각정에 올라 독립선언서를 소리 높여 읽으매 터지는 만세소리, 하늘에서 쏟아지는 태극기와 선언서를 손에 들고 대한문을 향하여 달려 나간다.

그 행렬에 경성제일고 4학년 심대섭(필명 심훈)이 있었다. 그리고 나흘 뒤 체포되어 서대문형무소에서 6개월 감옥살이를 한다. 거기서 어머니께 편지를 쓴다. “지금 조선에는 우리 어머니 같은 어머니가 몇천 분이요 또 몇만 분이나 계시지 않습니까” 하고.

심훈은 1930년 3월 1일 시 ‘그날이 오면’을 쓴다. “드는 칼로 이 몸의 가죽이라도 벗겨서/커다란 북을 만들어 둘쳐메고는” 아아, 이 시가 아니었다면 타오르는 독립정신도 이 겨레의 얼도 빛이 한풀 꺾였으리라. 세계 식민사에 어느 시인들이 어디 이 시 앞에 고개를 쳐들 만한 한 구절인들 써냈으랴.

시집 ‘그날이 오면’이 총독부 검열에 퇴짜를 맞자심훈은 큰댁이 있는 충남 당진에 내려가 소설 ‘상록수’를 써 1935년 동아일보 창간 15주년 장편 공모에 당선되었다. 죽어가는 농촌에 계몽의 횃불을 밝히고 눈바람에도 잎이 지지 않는 민족정기의 푸른 나무를 이 땅 가득 심어 놓은 것이다. 아직도 하늘에 사무치던 진정한 ‘그날’은 오지 않고 있는데.

이근배 시인·신성대 교수
#그날이 오면#심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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