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년만에 만난 曺-趙… 시간이 가른 ‘전설의 대국’

  • 동아일보
  • 입력 2015년 7월 27일 03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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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치훈, 초읽기서 돌 늦게 놓아 패배
曺 “바둑 이기고 승부는 져주네요”… 趙 “대선배 만나 멋있게 두려다…”
승패 떠나 복기하며 훈훈한 마무리

선비 같은 조훈현… 도인 같은 조치훈 깔끔한 선비 같은 조훈현 9단(왼쪽)과 은둔하는 도인 같은 조치훈 9단이 2003년 삼성화재배 8강전 이후 12년 만에 대결을 펼쳤다. 명불허전의 박력 있는 대결을 펼쳤으나 조치훈 9단이 초읽기에서 실수해 조훈현 9단이 시간승을 거뒀다. 장승윤 기자 tomato99@donga.com
선비 같은 조훈현… 도인 같은 조치훈 깔끔한 선비 같은 조훈현 9단(왼쪽)과 은둔하는 도인 같은 조치훈 9단이 2003년 삼성화재배 8강전 이후 12년 만에 대결을 펼쳤다. 명불허전의 박력 있는 대결을 펼쳤으나 조치훈 9단이 초읽기에서 실수해 조훈현 9단이 시간승을 거뒀다. 장승윤 기자 tomato99@donga.com
두 대국자의 머리엔 세월의 더께가 내려앉아 있었다. 조훈현 9단(62)은 검은 숱이 거의 보이지 않는 백발이었고, 마구 헝클어진 머리에 콧수염과 턱수염마저 깎지 않은 조치훈 9단(59)은 마치 도인 같은 느낌이었다. 하얀색의 모시 생활한복을 입고 부채를 든 조훈현 9단과 짙은 회색 양복에 검은 뿔테 안경을 쓰고 가끔 머리를 스스로 쥐어박는 조치훈 9단은 흑백의 대결처럼 묘한 대조를 보였다.

26일 서울 성동구 홍익동 한국기원에서 한국 현대 바둑 70주년 기념행사로 성사된 ‘조훈현-조치훈 특별 대국 전설의 귀환’은 오랜만에 화제를 모은 바둑계 ‘빅 매치’였다. 두 사람이 반상 앞에 마주 앉은 것은 2003년 삼성화재배 8강전 이후 12년 만이다.

한국 현대 바둑은 고 조남철 9단이 1945년 11월 5일 한국기원의 전신인 한성기원을 세운 것을 기점으로 삼는다. 한국기원 1층 바둑TV스튜디오에서 열린 이날 대국을 보러 이벤트를 통해 뽑힌 100명의 바둑 팬과 이세돌, 김지석 9단 등 후배 프로 기사 등이 2층 공개 해설장에 몰려들었다. 공개 해설은 유창혁, 최명훈 9단이 맡았다.

조치훈 9단의 흑번으로 시작된 이날 대결(제한 시간 1시간, 초읽기 40초 3회)은 한 치의 양보도 허락하지 않으려는 두 기사의 기세가 충돌하며 시종 치열한 ‘몸싸움’을 벌였다. 초반부터 대마를 공격하는 조치훈 9단의 예봉을 조훈현 9단이 잘 막아 내 우세를 확보했다. 조치훈 9단이 중반전 무렵 재차 백 대마를 잡으러 가며 건곤일척의 승부를 벌인 것이 하이라이트. 이후 쌍방의 대마가 얽힌 백병전이 치열하게 진행됐다.

하지만 ‘전투의 신’인 조훈현 9단과 ‘타개의 신’인 조치훈 9단의 대결은 해프닝으로 끝났다. 조치훈 9단이 마지막 초읽기에서 초를 다 부르고 나서 뒤늦게 착수하는 바람에 154수 만에 시간패를 한 것. 평소 제한시간을 일찌감치 쓰고 100수 이상을 마지막 초읽기에 몰려서 두곤 해 막판 집중력이 탁월한 조치훈 9단으로선 의외의 실수였다. 해설을 하던 유창혁 9단에 따르면 “끝날 당시 형세는 흑(조치훈)이 약간 우세하지만 승부를 점치기는 이른 상태”였다.

“상대가 바둑은 이기고 승부는 져 준 거죠.”(조훈현 9단)

“패자는 말이 없는 법입니다. 대선배를 만나 멋있게 두려다가 그만….”(조치훈 9단)

바둑이 끝난 뒤 공개 해설장으로 올라와 팬들에게 인사한 두 대국자는 화기애애한 분위기에서 복기를 하며 대국 소감을 밝혔다.

조훈현 9단은 “실력으론 젊은 기사들에게 밀리고 있지만 ‘내가 세계 1인자’라는 정신적 각오를 통해 승부사로서의 혼을 놓지 않으려고 한다”고 말했다. 조치훈 9단은 “기재는 조훈현 9단이 100배 낫다. 나는 그걸 극복하기 위해 100배 노력하는 수밖에 없었다. 젊을 때보다 더 열심히 공부하는데 공부 마치고 바둑통을 닫는 순간 잊어버린다”고 말해 웃음을 자아냈다.

한일 바둑의 자존심 ① 1980년 일본 명인전에서 우승한 뒤 그해 말 금의환향한 조치훈 9단(위쪽)과 한국에서 전관왕을 달성한 조훈현 9단의 기념대국. ② 1992년 개최된 동양증권배에서 만난 조훈현 조치훈 9단(아래쪽)이 나란히 앉아 다른 대국을 검토하고 있다. 한국기원 제공
한일 바둑의 자존심 ① 1980년 일본 명인전에서 우승한 뒤 그해 말 금의환향한 조치훈 9단(위쪽)과 한국에서 전관왕을 달성한 조훈현 9단의 기념대국. ② 1992년 개최된 동양증권배에서 만난 조훈현 조치훈 9단(아래쪽)이 나란히 앉아 다른 대국을 검토하고 있다. 한국기원 제공
이번 대국은 35년 전 기념 대국의 재현이다. 1980년 당시 명인전 획득으로 일본 바둑계를 제패한 조치훈 9단은 잠시 귀국해 바둑계 인사 최초로 은관문화훈장을 받았다. 이어 당시 한국 기전을 모두 휩쓴 전관왕 조훈현 9단과 2번의 기념 대국을 펼쳤다. 20대의 한일 바둑 영웅이 펼치는 승부에 바둑 팬은 물론 전 국민이 관심을 가졌다. 당시 조치훈 9단이 두 판을 모두 이겼다.

1980년대 말 이후 세계대회에서 조훈현 9단은 조치훈 9단에게 내리 8판을 이겼고, 2003년 마지막 대국에서는 조치훈 9단이 이겨 체면치레를 했다. 이날 승리로 조훈현 9단은 비공식 대국을 포함해 상대 전적에서 9승 5패를 기록했다.


서정보 기자 suhchoi@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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