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황인숙의 행복한 시읽기]<395>묵매(墨梅)

  • 동아일보
  • 입력 2015년 4월 6일 03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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묵매(墨梅) ―강영은(1956∼ )

휘종의 화가들은 시(詩)를 즐겨 그렸다

산 속에 숨은 절을 읊기 위하여 산 아래 물 긷는 중을 그려 절을 그리지 않았고 꽃밭을 달리는 말을 그릴 때에는 말발굽에 나비를 그리고 꽃을 그리지 않았다 몸속에 절을 세우고 나비 속에 꽃을 숨긴 그들은 보이지 않는 것에 붓을 묻었다

사람이 안 보인다고 공산(空山)이겠는가

매화나무 등걸이 꽃피는 밤, 당신을 그리려다 나를 그렸다 늙은 수간(樹幹)과 마들가리는 안개비로 비백(飛白)질하고 골 깊이 번지는 먹물 찍어 물 위에 떠가는 매화 꽃잎만 그렸다 처음 붓질했던 마음에 짙은 암벽을 더했다


휘종이라면 중국 송나라의 그 유명한 제8대 황제를 말하는 건가. 민정(民政)은 몰라라 하고 사치와 향락에 빠져 살다 제 나라를 멸망의 길로 이끌었다지. 한 남성의 못된 행각이 줄줄이 드러나서 그를 지탄하는 말로 세상이 떠들썩해도 누군가 안타까이 중얼거릴 수 있으리. ‘나한테는 참 좋은 오빠였어요.’ 휘종은 황제로서는 무능하고 괘씸한 자였지만 궁정 서화가(書畵家)를 양성하는 등 문화예술 애호가이자 수호자였으며 오늘날에도 ‘당대에 따라올 자가 없을 정도로 빼어난 화가’라고 평가받는 예술가다. ‘예술밖엔 난 몰라’ 하는 황제가 예술가들에게는 참 좋은 오빠이려나…. 그리 생각하고 태평성대를 누린 예술가도 많을 테지만 ‘보이지 않는 것에 붓을 묻은’ 예술가도 적지 않을 테다. ‘사람이 안 보인다고 공산(空山)이겠는가’, 이 구절에서 사람들이 자기 생각을 에둘러서 표현하곤 했던, 검열이 일상적이었던 시절을 떠올리는 건 지나치려나.

‘당신을 그리려다 나를 그렸다’, 당신을 그리려고 이런저런 맥락을 찾다 보니 내가 그려졌단다. 두 사람의 인연을 짐작하겠다. 화자가 그린 그림은 어두운 ‘물 위에 떠가는 매화 꽃잎’ 몇 점이다. 굽은 나뭇가지며 거기서 뻗은 잔가지며 다 생략하고 그린 ‘매화나무 등걸이 꽃피는 밤’, 매화꽃 향기 묵향(墨香)인 듯 배어나는 어떤 사랑의 내력…. 시인의 은근하고 진중한 삶의 자태랄지 시론(詩論)이 엿보이는 시다.

황인숙 시인
#묵매#강영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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