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조는 한국인의 맥박이오"

  • 동아일보
  • 입력 2015년 3월 23일 03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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禪시조 대가 오현스님… 美버클리大초청강연

20일 미국 버클리 캘리포니아대에서 열린 ‘설악무산 그리고 영혼의 울림’ 중 오현 스님(오른쪽)과 권영민 버클리대 초빙교수가 대담하고 있다. 이날 오현 스님은 “우리는 콜럼버스가 미국을 발견하기 전부터 풍류를 즐긴 민족”이라며 황진이의 시조 여러 편을 멋들어지게 낭송해 큰 박수를 받았다. 버클리 캘리포니아대 한국학센터 제공
20일 미국 버클리 캘리포니아대에서 열린 ‘설악무산 그리고 영혼의 울림’ 중 오현 스님(오른쪽)과 권영민 버클리대 초빙교수가 대담하고 있다. 이날 오현 스님은 “우리는 콜럼버스가 미국을 발견하기 전부터 풍류를 즐긴 민족”이라며 황진이의 시조 여러 편을 멋들어지게 낭송해 큰 박수를 받았다. 버클리 캘리포니아대 한국학센터 제공
《 “우리는 미국에 건너올 때 김치만 가져왔는지 시조를 전혀 알리지 못했어요. 일본인들은 미국에 하이쿠(일본 고유의 정형시)를 널리 전파해 미국 교과서에도 하이쿠가 수록됐답니다. 우리는 시조가 진부하다며 부르지 않아요. 시조는 흘러간 유행가가 아닙니다. 한국인의 맥박이에요.” 설악산 신흥사 조실(祖室·규모가 큰 사찰의 최고 어른) 오현 스님(83)의 일갈이다. 그런데 장소는 국내 사찰의 선방이 아닌 미국 버클리 캘리포니아대다. 》

20일(현지 시간) 이 대학 한국학센터에서 스님을 초청한 가운데 ‘설악무산 그리고 영혼의 울림’ 행사가 열렸다. 필명인 오현 스님으로 더 유명한 스님의 공식 법명은 무산이다. ‘선(禪) 시조’의 대가인 스님은 2007년 시집 ‘아득한 성자’로 정지용문학상을 수상하기도 했다.

영어 시조 보급 운동을 펼치는 데이비드 매캔 전 하버드대 한국학 소장, 시조 번역가 하인즈 인수 펜클 뉴욕주립대 교수의 시조 강연에 이어 스님과 이 대학 동아시아어문학과 초빙교수로 이번 행사를 기획한 권영민 단국대 석좌교수의 대담, 이유경 명창의 시조창 공연 순으로 진행됐다. 미국 계관시인이자 버클리 캘리포니아대 영문학과 교수인 로버트 하스 교수를 비롯해 현지 주민과 교민, 대학생 등 180여 명이 참석했다.

오현 스님은 참선법에 대한 질문이 나오자 “해가 뜨면 일어나 밥 먹고, 웃을 일 있으면 웃고, 아첨할 일 있어 아첨하다 보면 하루가 후다닥 간다”며 “별거 없다. 하루 일과가 다 참선이고 따로 선이 존재하지 않는다”고 답했다.

다시 권 교수가 “말이 어렵다. 그래서 선이 무엇인가”라고 되물었다. 이에 오현 스님은 장난치듯 권 교수를 때리는 시늉을 하더니 “참 딱하다. 내빈들은 다 알아들었는데 교수님만 자꾸 어렵게 듣는다”라고 하자 객석에선 박장대소가 터졌다. 스님의 말이 이어졌다. “학자들이 선을 말과 글로 만들어 놓았는데 그것을 따라가면 다 죽습니다, 죽어요. 선을 이야기하면 철사로 자기를 꽁꽁 결박하는 것과 같아요. 토끼는 뿔이 없고 거북이는 털이 없는데 토끼의 뿔, 거북이의 털 이야기를 내가 이 자리에서 죽을 때까지 한들 무슨 의미가 있겠소.”

오현 스님은 지혜를 들려 달라는 대담자의 요청에 “입은 열지 않으면 본전이고 열면 손해”라며 여러 번 천진한 웃음을 짓고서야 입을 열었다. “인류에는 절대존자가 없어요. 부처님도 우리와 똑같은 인간으로 태어났다 죽었어요. 내가 없으면 세상에 극락도 지옥도, 아무 것도 없어요. 내가 절대존자임을 먼저 자각하면 모든 사람이 한 분 한 분 다 절대존자임을 알고 받들게 됩니다. 이것이 석가모니 부처의 깨달음입니다.”

한반도를 비롯해 세계평화를 위한 화두도 나왔다. 오현 스님은 “핵은 인류 재앙의 근원이니 지금 폐기하지 않으면 인류는 큰 어려움을 겪게 될 것”이라며 “미국은 기독교 정신으로 나라를 세웠으니 핵과 살상 무기를 만드는 막대한 돈으로 복음 사업에 사용하라”고 했다.

오현 스님은 다함께 5초간 세계평화를 위해 기도하자며 고개를 숙인 뒤 죽비로 손바닥을 세 번 힘 있게 내리쳤다. 권 교수는 “스님께서 아마 이 자리를 설악산 선방으로 알고 허공이 찢어지는 죽비를 치신 것 같다”고 했다.

하스 교수는 “오현 스님은 물에 비친 달을 바라볼 순 있어도 퍼 올릴 수는 없다고 했다. 그러나 오늘 우리는 이 자리에서 퍼 올려 가지고 갈 수 있는 귀중한 것을 얻었다”고 말했다. 재미교포 학생 애슐리 김 씨(21)는 “시조를 구식이라고 생각했는데 스님 강연을 듣고 나니 하고 싶은 이야기를 재치 있게 풀어내는 게 미국의 힙합보다 낫다”고 했다.

버클리(캘리포니아)=박훈상 기자 tigermask@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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