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립경주문화재硏 월성터 시굴 현장
흙구덩이 곳곳에 주춧돌 드러나… 건물터 6곳 담장터 12곳 발견
길이 28m 폭 7.1m 대형 회랑터… 신라 왕궁이 있었던 사실 뒷받침
18일 문화재청 산하 국립경주문화재연구소가 경주 월성 시굴 현장에서 공개한 삼국시대와 통일신라 시기의 토기와 고배, 벼루, 뚜껑들. 이번에 함께 출토된 각종 기와와 더불어 이곳이 신라시대 천년 왕성이었음을 오롯이 보여주고 있다. 문화재청 제공
《 ‘신라 파사왕 22년(101년) 금성 동남쪽에 성을 쌓아 ‘월성(月城)’이라고 불렀다. 그 둘레가 1023보(약 1.9km)에 달했다.’ (삼국사기) ‘왕이 대나무로 피리를 만들어 ‘월성’의 천존고(天尊庫)에 간직했다. 이를 만파식적(萬波息笛)이라 부르고 국보로 삼았다.’ (삼국유사) 》
문헌으로만 전하던 천년 왕성(王城)의 역사가 우리 앞에 처음 속살을 드러냈다. 18일 문화재청이 공개한 경주 월성 시굴(試掘) 현장은 30cm 깊이로 파헤친 흙구덩이 사이로 1000년 전 주춧돌(초석·礎石)과 적심(積心·초석 아래 돌로 쌓은 기초 부분)이 곳곳에 박혀 있었다. 국립경주문화재연구소는 지난해 12월 시작된 시굴을 통해 삼국시대와 통일신라 시기의 건물터 6곳과 담장터 12곳, 기와, 그릇, 등잔, 벼루 등을 발견했다.
본격 발굴에 앞서 ‘트렌치(시굴갱)’라는 얕은 갱도만 파는 단계인 만큼 관심이 쏠리는 정전(正殿) 등 핵심 전각(殿閣)들은 아직 발견되지 않았다. 건물터 내 주춧돌이나 기단 대부분은 한눈에 봐도 거의 다듬지 않은 원석 상태였다. 5호 건물지에서만 동그란 주춧돌과 기다란 장대석 기단이 발견됐다. 함께 현장을 둘러본 강순형 국립문화재연구소장은 “왕궁의 전각에는 잘 다듬은 주춧돌과 장대석 기단이 들어가기 마련”이라며 “토층을 더 깊게 파야 전각 터가 드러날 것”이라고 설명했다.
앞서 발굴팀은 8년 전 지하 레이더 탐사결과를 바탕으로 이번 시굴이 진행된 석빙고 부근에 정전이 있을 것으로 추정했다. 하지만 더 서쪽지역에 있을 가능성도 제기된다. 발굴팀 관계자는 “통일신라 이후 왕경의 규모가 커지면서 전각의 중심축이 이동했을 가능성도 있다”고 말했다.
월성 시굴과정에서 발견된 건물터 6곳 가운데 가장 규모가 큰 3호 건물지.이와 관련해 길이 28m, 폭 7.1m에 이르는 대형 건물터(3호 건물지)가 눈길을 끈다. 이곳은 적심 사이의 거리도 2m나 된다. 근처에서는 이 건물터와 평행선을 그리는 담장과 ‘ㄱ’자 모양의 배수로도 함께 발견됐다. 전체적으로 한 변이 훨씬 길쭉한 모양을 감안할 때 ‘회랑(回廊)’이라는 추측이 나온다. 박윤정 경주문화재연구소 학예연구실장은 “서민 주거지에서는 잘 나오지 않는 회랑형 건물터는 이곳이 왕궁이었던 사실을 뒷받침해 준다”고 말했다.
신라와 가야에서 제사용으로 쓰인 고배(高杯·굽다리 접시)를 비롯해 병, 등잔, 벼루, 막새기와, 귀면기와, 치미(용마루 양 끝에 올리는 장식 기와) 등 신라시대 유물도 함께 출토됐다. 특히 일부 평기와에는 ‘習部(습부)’나 ‘漢(한)’과 같은 왕경을 구성한 6부(部) 명칭이 새겨져 있었다. 마립간 시대 이전 신라 6부의 부족장은 왕에 버금가는 막강한 권력을 쥐고 있었다. 기와에서는 제작 시기를 가늠할 수 있는 ‘의봉사년(儀鳳四年·서기 679년) 개토(皆土)’라고 적힌 명문도 함께 발견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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