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맹 가리 낭독의 밤’에서 소설가들이 사회자의 질문에 답하며 웃고 있다. 왼쪽부터 조경란 함정임 이승우. 마음산책 제공
“로맹 가리의 소설은 우리가 언제나 사랑하면서 살아야 한다고 얘기해요.”(소설가 조경란)
“뭔가에 쫓기거나 현실에 묻혀 소설로 가는 길에 장애를 만났을 때 로맹 가리를 펼쳐 듭니다.”(소설가 함정임)
프랑스 소설가 로맹 가리(1914∼1980)의 탄생 100주년을 낭독으로 기리는 밤. 26일 서울 중구 칠패로 주한프랑스문화원에서 ‘로맹 가리 낭독의 밤’이 열렸다.
올해 탄생 100주년을 맞은 프랑스 현대문학의 거장 로맹 가리. 그는 에밀 아자르라는 필명까지 두 개의 이름으로 30여 작품을 발표했고 유일하게 공쿠르 상을 두 번 수상한 야망과 열정의 작가였다. 마음산책 제공로맹 가리는 러시아 이민자로 프랑스에 정착해 주류사회 진입을 꿈꿨다. 제2차 세계대전 때 프랑스 공군으로 참전했다가 공을 세워 외교관이 됐다. 1956년 마흔두 살에 ‘하늘의 뿌리’로 권위 있는 문학상인 공쿠르 상을 수상해 스타 작가가 됐다. 하지만 문단의 박한 평가가 이어지자 필명 에밀 아자르로 작품을 발표했다. 필명으로 쓴 ‘자기 앞의 생’으로 1975년 두 번째 공쿠르 상을 받았다. ‘에밀 아자르와 로맹 가리는 같은 사람’이라는 유서를 남기고 권총 자살로 생을 마쳐 프랑스 문단에 큰 충격을 안겼다. 최근 1974년작 ‘밤은 고요하리라’(마음산책)가 출간됐다.
이날 사회를 맡은 서평가 금정연은 “오늘 밤은 로맹 가리가 주인공이지만 그만이 주인공은 아니다”라고 했다. 자신의 글에 로맹 가리의 흔적을 남긴 소설가 이승우(55) 함정임(50) 조경란(45)이 낭독자로 나섰다. 이승우는 자신의 장편 ‘한낮의 시선’에 로맹 가리를 인용했고, 함정임은 ‘새들은 페루에 가서 죽다’를 읽고 페루로 떠난 뒤 이 경험을 글로 풀었다. 조경란은 ‘자기 앞의 생’ 한국어판의 해설을 썼다. 이날 주한프랑스문화원은 독자 150여 명으로 가득 찼다. 문학동네 인터넷카페와 인터넷서점을 통해 이날 행사에 참가 신청을 해서 선발된 이들이다.
이승우는 ‘솔로몬 왕의 고뇌’에서 왕년에 잘나갔던 샹송 가수 마드무아젤 코라가 내면을 고백하는 장면을 낭송했다. 에밀 아자르라는 필명으로 발표한 마지막 소설이다. “‘진지하긴 하지만 재미없는 소설을 쓰는 작가’ 같은 말이 붙으면 벗어나기가 어렵죠.(웃음) 필명으로 글을 쓰면 이승우라는 선입견을 벗고 보니까 독자에게 다르게 다가갈 수 있을 것 같습니다. 로맹 가리에게도 그런 안경을 벗게 할 새로운 이름이 필요했겠지요.”
함정임은 ‘자기 앞의 생’에서 꼬마 모모가 동네 할아버지에게 “사람은 사랑 없이도 살 수 있나요?”라고 묻는 부분을 골랐다. 모모는 로자 아줌마에게 위탁돼 성장한다. 함정임 자신이 한 살 때 아버지가 세상을 떠났고, 남편과 사별한 뒤 아들을 데리고 프랑스 파리에서 한동안 지낸 적이 있다. “아비 없는 막내가 가진 불안감, 어미가 돼선 싱글맘으로 지냈기에 이 소설이 특별하게 다가옵니다. 로맹 가리를 읽다 보면 ‘(나도) 쓸 수 있지 않을까’라는 희망이 생깁니다.”
조경란은 흑인만 공격하도록 세뇌받은 개를 그린 ‘흰 개’를 읽었다. 그는 ‘그것은 회색 개였다’는 첫 문장에 압도됐다면서 ‘흰 개’는 겹이 많은 소설이지만 각자 느끼는 대로 받아들이는 게 중요하다고 했다. “언제나 사람에게 상처받고 배신당하는 게 우리 인생이지만, 더 나쁜 것은 그런 경험 때문에 사랑을 믿지 않는 것이 아닐까요. 로맹 가리는 이 소설을 통해 끝까지 따라갈 만한 사람, 존재에 대한 얘기를 하고 싶었다고 생각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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