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타에서 트럼펫으로… 새끼손가락 하나가 바꾼 ‘재즈 인생’

  • 동아일보
  • 입력 2014년 4월 30일 03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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데뷔앨범 ‘타임 스탬핑’ 낸 재즈 트럼페터 오재철

‘왼손은 거들 뿐’은 농구의 슛 자세에만 통용되는 격언은 아니다. 왼손 새끼손가락 부상 이후 오른손만으로 연주할 수 있는 트럼펫으로 전향한 재즈 연주자 오재철. 그는 “내년엔 5, 6인조의 소편성 음반 녹음에 도전해 보고 싶다”고 했다. 전경헌(크레타 스튜디오)
‘왼손은 거들 뿐’은 농구의 슛 자세에만 통용되는 격언은 아니다. 왼손 새끼손가락 부상 이후 오른손만으로 연주할 수 있는 트럼펫으로 전향한 재즈 연주자 오재철. 그는 “내년엔 5, 6인조의 소편성 음반 녹음에 도전해 보고 싶다”고 했다. 전경헌(크레타 스튜디오)
《 ‘몸’ ‘밥’ ‘컴백홈’ ‘ㅋㅋㅋㅋㅋ’…. 일상에서 왼손 새끼손가락의 존재감을 느낄 일은 컴퓨터 자판에 이런 걸 쳐 넣는 순간을 제외하면 많지 않다. 왼손 새끼손가락이 인생을 송두리째 바꾼 사람이 있다. 재즈 트럼페터 오재철(33)이다. 운명의 왼손 손목터널증후군 오른손 연주 가능한 악기로 궤도 수정 “어떤 장애도 음악열정은 못막아” 》

손가락에 아무 이상이 없던 11년간, 그러니까 1998년부터 2009년 7월까지 오재철은 록 기타리스트였다. 분당고 2학년 때 전기기타 연주를 시작했다. 메탈리카, 판테라, 핑크 플로이드, 스티비 레이 본이 그의 우상이었다. 2000년 동아방송대 음향제작과에 입학해 음향 엔지니어의 길을 선택했지만 기타 연주자의 꿈을 접을 수 없어 6년 뒤, 같은 학교에 기타 연주 전공으로 다시 시험 봐 입학한 그였다.

그의 음악세계는 20대 후반에 팻 메스니의 ‘이매지너리 데이’(1997년) 앨범을 접한 뒤 첫째 지각변동을 겪었다. 오재철은 결국 재즈 기타리스트로 진로를 틀어 2008년 미국 보스턴의 버클리음대 오디션에 합격했다. 꿈같은 시간은 짧았다.

어느 날부터인가 왼손 새끼손가락이 굳어지더니 말을 안 듣기 시작했다. “일상생활엔 지장이 없었지만 왼손 새끼로 기타 지판이 똑바로 안 눌러졌어요. 병원에서 ‘손목터널증후군’ 판정을 받았죠.”

오재철은 2009년 4월, 수술 후 왼손에 깁스를 한 채 보스턴으로 향했다. 증상은 호전되지 않았고 그는 석 달 만에 귀국했다. “눈물은 안 났어요. 음악은 포기 못하겠더라고요. 20대를 다 바쳤는데. 악기만 포기하자는 생각이 들었죠.” 귀국 전 보스턴의 클럽에서 본 트럼페터 테런스 블랜처드의 연주가 자꾸 떠올랐다. ‘그래, 오른손만으로도 연주가 가능한 악기는… 트럼펫뿐이잖아!’

귀국과 동시에 트럼펫을 배웠다. 누구나 그렇듯 처음엔 ‘삑’ 소리 하나 내기 힘들었다. 미친 듯 매달렸다. 배운 지 6개월 만에 실기시험을 통과했다. 트럼펫 전공으로 버클리에 다시 입학하게 된 거다.

“‘이거(트럼펫) 아니면 죽음’이란 생각뿐이었죠.” 수업과 아르바이트를 제외한 모든 시간을 스물아홉 나이에야 입문한 트럼펫을 연습하는 데 바쳤다. “기타는 열정만 있으면 10시간이고 20시간이고 계속 연습할 수 있지만 트럼펫은 아니에요. 구강과 호흡을 많이 쓰는 악기여서 한 시간 하면 한 시간을 쉬어줘야 하거든요.” 입에서 트럼펫을 뗀 ‘한 시간들’은 피아노 연주와 작곡 연습에 할애했다.

지난해 오재철은 갖가지 관악기가 총동원된 재즈 빅밴드 작품을 작곡 편곡 지휘해 졸업 심사를 통과했다. 관악기를 처음 잡은 지 채 5년도 안 된 시점이었다. 내친김에 보스턴 현지에서 그는 16인조 라지 앙상블 앨범 ‘타임 스탬핑’을 녹음했다.

‘타임 스탬핑’은, 덩치가 큰 만큼 편곡이 난해하고 물리적 제약도 많은 빅밴드 편성으로, 전곡(6개)을 자작곡으로 구성했다는 면에서 신인의 데뷔작으로는 유례를 찾기 힘들다. 떠나간 이들을 기억하는 모음곡 ‘더 레프트’ 3부작을 중심으로 대규모 재즈 악단의 매력을 잘 살린 수작이다.

록 음악이, 전기기타 연주가 그리울 때는 없을까. 작은 손가락 하나 때문에 포기했는데. “제 음반을 한번 들어보세요. 그때 파고든 핑크 플로이드가, 너바나가 여전히 제 음악 안에 들어있어요. 더구나 연주자들끼리 즉흥연주로 대화를 나눌 수 있는, 가장 흥미진진한 음악이 바로 재즈거든요.” 30일은 유네스코가 지정한 세계 재즈의 날이다.

임희윤 기자 imi@donga.com
#트럼펫#손목터널증후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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