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옥에나 가버려!”

  • 동아일보
  • 입력 2014년 3월 3일 03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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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대 초반 내게, 20대 초반 한 여자가
[잊지 못할 말 한마디]김경주 (시인)

김경주(시인)
김경주(시인)
20대 초반 나는 초저녁 지방의 변두리 거리에서 한 여자에게 이런 말을 들었다. “지옥에나 가버려!” 그러니까 정리를 해보면 나는 그녀와 헤어지고 있는 순간이었나 보다. 그녀는 나에게 이별을 선언하고 있는 것임에 틀림없었을 것이다. 그렇지 않고서야 어떻게 면전에 두고 그렇게 험한 말을 할 수 있겠는가? 그 순간엔 아마 나는 바지 주머니에 두 손을 찔러 놓은 채 피식 웃었던 것 같다. “그래. 그러지 뭐.” 등을 돌려 그녀를 둔 채 모퉁이를 돌아 뚜벅뚜벅 걸었던 것 같다. 그런데 시간이 흐를수록 나는 그 순간이 잊혀지질 않는다. 정확하게 말하면 그 말이 떠나지 않는다. “지옥에나 가버려!”라는 말은 20여 년이 다 되어가는 동안 머릿속에서 어두운 행성처럼 돌고 있는 것이다.

“언젠가 그녀를 다시 만나게 되면 꼭 사과를 받아야겠어. 다른 건 몰라도 지옥이라는 단어는 좀 취소해 달라고 말이야.” 이번엔 물리학을 공부하는 다른 친구에게 이렇게 투덜거렸더니 그는 내게 이렇게 조언했다.

“음, 분명 그녀는 자네에게 상심을 주려고 했던 말이니 완전히 취소한다면 의미가 없어질 거라고 생각할 거야. 그러니 그쪽에서 그 말을 완전히 취소하긴 어려운 일이라고. 하지만 마음이 좀 아물었다면 지옥이라는 단어 대신에 다른 걸로 바꾸어 줄 순 없는지 물어보는 것은 괜찮을 것 같아. 예를 들어 똥통이랄지, 새집이랄지, 변기통이랄지, 뭐 빠지게 되면 기분이 별로인 곳은 이 세상에 얼마든지 있을 테니까 말이야.” 그 친구의 말 역시 별 도움이 안됐다.

그녀와 나는 소위 사귀는 관계가 아니었다. 당시 나는 몇 개월 후 군 입대를 앞둔 채 웨스턴 바에서 아르바이트를 하고 있었다. 그녀는 나보다 몇 개월 정도 먼저 그곳에서 일하고 있었다. 그녀는 보라색으로 머리를 염색했고, 나는 탈색한 노랑머리였다. 나는 늘 오후 5시에서 5시 10분 사이에 가게에 나왔고, 그녀는 늘 5시 10분에서 20분 사이에 출근했다. 항상 6시 30분에서 7시 사이에 우리는 함께 부엌에서 저녁을 먹었고, 함께 양치질을 한 후 손님 맞을 준비를 했다. 그녀는 늘 새벽 2시에 퇴근했고 나는 늘 새벽 5시에 마감을 하고 퇴근을 했다. 우리는 항상 새벽 6시에 24시간 음악다방에서 다시 만나 손을 꼭 잡고 맥주를 마시며 음악을 들었다. 나는 하이네켄을 마셨고 그녀는 잭콕을 마셨다. 그러곤 각자 집으로 돌아가서 자고 오후 6시에 가게로 다시 나와 바 구석에서 손을 잡았다. 몇 달째 이 일을 반복했을 뿐이다. 그리고 입대를 며칠 앞둔 어느 날 저녁, 나는 홀로 지옥에 가게 된 것이다. 수많은 짝사랑을 경험했던 친구의 조언은 꽤 흥미로웠던 것 같다.

“네가 그 지옥으로부터 벗어날 수 있는 방법이 하나 있긴 있어.” “그래? 그게 뭔데?” “다음에 그녀를 만나게 된다면 ‘사실 그때 지옥이라도 함께 가자!’ 이렇게 말해주지 못했다는 것을 후회하고 있다고 해.” “지금 와서 그 말이 무슨 효과가 있을까?” “적어도 널 좋아했던 마음의 지옥으로부터 그녀가 떠날 수는 있겠지.” 그 말을 듣고 나는 언젠가 그녀를 다시 만나면 그녀를 지옥으로부터 구해줘야겠다고 마음먹었다. 그것이 내가 지옥에서 빠져나오는 길이고, 우리가 지금 살고 있는 길일 테니까. 누군가에게 ‘지옥에나 가버려!’라는 말은 참 오래가니 조심해야 한다.

김경주(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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