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의 향기]건강 독재 사회… 아픈 것도 罪

  • 동아일보
  • 입력 2014년 1월 4일 03시 00분


◇어떤 소송/율리 체 지음·장수미 옮김/268쪽·1만3000원/민음사

‘어떤 소송’은 구성원의 건강유지를 최고의 가치로 보는 미래의 독재사회를 배경으로, 체제의 무오류성에 도전하는 개인의 자유와 자기 결정권이 어떻게 유린되는지를 생생히 보여준다. 민음사 제공
‘어떤 소송’은 구성원의 건강유지를 최고의 가치로 보는 미래의 독재사회를 배경으로, 체제의 무오류성에 도전하는 개인의 자유와 자기 결정권이 어떻게 유린되는지를 생생히 보여준다. 민음사 제공
건강 독재 사회라는 참신한 발상으로 빚은 디스토피아(어두운 미래)가 배경인 소설이다. 작품의 배경은 가까운 미래인 21세기 중엽. 사회의 모든 법과 제도는 구성원의 건강과 안전을 최고 가치로 두고 설계되고 운용된다. 술과 담배가 법으로 금지되고 이를 위반하면 처벌을 받는 것은 기본. 나무 위에 지은 오두막을 ‘다칠 위험’, 반려동물은 ‘전염 위험’으로 부르는 이곳에서는 규칙적인 운동과 절제된 삶, 신체 상태의 정기 검진과 그 결과를 국가에 제출하는 것이 강제된다. 배우자의 선택마저 (아마도 후손의 질병 가능성을 없애려고) 국가기관이 면역 체계가 맞는 남녀를 짝지어 주는 이곳은 인사말마저 ‘상떼(건강)!’다.

소설의 주인공은 생물학자 미아. 대부분의 사람들처럼 ‘방법(The Method)’으로 통칭되는 이 체제에 순응하며 살아온 미아의 삶은, 체제의 무오류성에 의심을 품어 왔던 남동생 모리츠가 살인범 누명을 쓰고 동결형(사형 대신 냉동인간을 만드는 형벌)에 처해진 것을 계기로 송두리째 뒤바뀐다. 동생의 부재를 슬퍼하며 자기관리에 잠시 소홀했던 미아는 금세 ‘방법’에 반대하는 불순분자로 의심받는다. 급기야 몰래 담배를 피우다 적발된 것을 기화로 국가는 미아를 체제 전복 세력의 우두머리, 시민 안전을 위협하는 테러리스트로 지목하고 형사소송을 건다. 그리고 이 모든 일의 배후에는 방법 이데올로기의 신봉자이자 전도사인 유명 언론인 크라머가 자리한다.

영국 신문 가디언도 언급했듯이 이 소설은 여러 모로 조지 오웰의 ‘1984’를 떠올리게 한다. ‘1984’가 텔레스크린으로 구성원의 말과 행동을 24시간 감시하는 빅브라더의 사회라면, 이 소설의 세계는 구성원의 생활 습관과 건강 상태까지 관리하는 훨씬 촘촘한 감시망을 가진 디스토피아다. 특히 건강함과 건전함으로 이해되는 정상성을 유지하려고 개개인의 운동량이나 식습관 같은 세세한 규칙을 만드는 권력의 작동 방식은 미셸 푸코와 조르조 아감벤의 생명정치론을 떠올리게 한다. 이 체제의 문제는 미아가 테러리스트로 낙인찍히는 데 결정적 계기가 되는 선언문을 통해 구체화된다.

“나는 내 살과 피가 아니라 정상 육체라는 집단적 환상을 구현해야 한다는 몸에 대한 믿음을 철회한다. 나는 스스로 건강이라 정의하는 정상성에 대한 믿음을 철회한다… (중략) …보편적 복리는 자기 결정권을 감당할 수 없는 비용 요소로만 보기 때문에 나는 보편 복리에 대한 믿음을 철회한다.”(185쪽)

SF나 법정 소설의 외양을 하고 있지만 권력의 작동 방식과 자유의지, 자기 결정권 같은 가볍지 않은 정치적, 철학적 문제들을 맛깔스럽게 버무려 낸 작품이다. 소설 출간(2009년)에 앞서 2007년 희곡으로 먼저 발표됐다.

우정렬 기자 passion@donga.com
#어떤 소송#건강 독재 사회#미아#테러리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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