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국 청나라 말기의 리쭝우(李宗吾)가 처음 제창한 ‘후흑(厚黑)’은 ‘낯가죽이 두꺼워 뻔뻔하다’는 뜻의 ‘면후(面厚)’와 ‘속이 검고 알 수 없어 음흉하다’는 뜻의 ‘심흑(心黑)’을 더한 말이다. 이는 뻔뻔함과 음흉함의 처세술 정도로 알려져 왔다. 그러나 저자는 후흑의 목표가 난세에서 나라를 구한다는 ‘후흑구국(厚黑救國)’에 있다는 리쭝우의 노선을 강조한다. 그 때문에 서양 지성사에서 제왕학의 정전으로 불리는 마키아벨리즘에 빗대 ‘중국판 마키아벨리즘’으로도 불린다.
1912년경 처음 거론된 후흑학은 1980년 홍콩에서 복간본이 출간되면서 주목을 받았다. 후흑학은 마오쩌둥(毛澤東)이 탐독하고 문화대혁명을 일으켰다는 소문 덕분에 후대에 빛을 보게 됐다는 해석도 있다.
책은 리쭝우가 ‘후흑학’에서 대표적인 난세로 거론한 오월시대와 초한지 시대, 삼국시대, 근현대 가운데 초한지 시대에 초점을 두고 영웅 10명의 처세를 분석·평가하는 틀을 보여준다. 감정이 얼굴에 잘 보이고 속마음도 쉽게 들킨다는 ‘박백(薄白)’을 후흑의 대칭 개념으로 설정하고 면후심흑(面厚心黑), 면후심백(面厚心白), 면박심흑(面薄心黑), 면박심백(面薄心白)의 네 가지 기준을 제시한다. 이 기준에 따라, 강한 자존심을 숨기지 못해 패한 항우를 면박심백이라 지적하고 두꺼운 얼굴과 검은 속내로 천하를 얻은 유방을 면후심흑으로 인정했다. 시비 붙은 상대방의 가랑이 밑을 기는 수모를 참았지만 유방의 심흑까지 이기지는 못한 한신을 면후심백이라 평했다. 항우의 책사로 심모원려의 계책을 지녔지만 뻔뻔하지 못해 항우에게 버림 받은 범증은 면박심흑에 해당한다.
후흑을 극단으로 밀어붙여 낯가죽이 두꺼운데도 형체가 없고 속마음이 검은데도 색채가 없는 경지를 최고로 제시한다. 후흑의 궁극을 이루고도 불후불흑(不厚不黑)이라는 정반대의 평가를 받을 정도로, 절대 알아챌 수 없는 처세가 난세의 패권을 얻는다고 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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