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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아일보|문화

[권영민의 그때 그곳]<8> 10주기 맞은 이문구의 보령 생가터-집필실

입력 2013-02-18 03:00업데이트 2013-02-18 10:3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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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촌수필’ 태어난 문학성소엔 스산함과 적막감만 감돌아
충남 보령시 청라면 장산리 계곡에 있는 이문구의 집필실을 찾은 권영민 교수. 10년 전 주인을 잃은 집필실은 찾는 이 없이 을씨년스럽게 남아있었다. 보령=황인찬 기자 hic@donga.com
《 ‘관촌수필’의 작가인 이문구(1941∼2003)가 글쓰기를 위해 기거했던 오두막은 충남 보령시 청라면 장산리의 계곡에 자리 잡고 있다. 그가 10년 전 세상을 떠난 후 이 집은 그대로 비어 있다. 이제는 찾아오는 이도 별로 없다. 나는 동향의 문단 후배가 되어 몇 차례 이곳에서 이문구와 만났었다. 집필실이라는 말에 그는 크게 웃었다. 이 조그만 오두막에 어울리지 않는다는 것이다. 이곳 진당산 아래 골짜기는 조선 후기 유학자 토정 이지함을 배향하던 화암서원(花巖書院)이 가깝다. 나지막한 산자락 끝으로는 청천저수지가 널따랗게 펼쳐있다. 이문구는 1989년 이곳으로 내려오면서 온몸으로 가담했던 민주화운동 대신에 온몸으로 글다운 글을 쓰겠노라고 했다. 방 한 칸에 마루 하나 그리고 작은 부엌을 갖춘 이 집에서 그는 십년이 넘게 글을 썼다. 》

이문구는 충남 대천 갈머리(관촌마을)에서 1941년 토정과 같은 한산 이씨 가문의 셋째 아들로 태어났다. 그러나 나이 열 살이 되던 해 6·25전쟁이 터지자 남로당 간부였던 아버지는 예비검속에 걸려 처형당했고, 끌려간 형들마저 무참하게 살해당했다. 전쟁이 끝난 후에 조부도 세상을 떠났고, 화병을 앓던 모친도 잃었다. 중학을 겨우 나온 이문구는 결국 고향을 등진 채 서울로 올라갔다.

그는 자신이 겪은 끔찍한 전쟁을 아버지의 이름과 함께 지워버리고자 애썼다. 하지만 그럴수록 더 큰 상처로 덧났다. 아무것도 가진 것이 없던 그는 글쓰기에 매달렸다. 힘든 고학으로 서라벌예대 문예창작과를 졸업하고 소설가 김동리의 추천으로 1966년 ‘현대문학’에 단편 ‘백결’로 등단했다.

올해는 ‘관촌수필’의 작가 이문구의 10주기를 맞는 해다. 그는 유언대로 한 줌의 재가 되어 고향 갈머리의 솔밭 길 사이에 뿌려졌다. 동아일보DB
작가가 된 후 그는 1970년대의 살벌했던 시대상황에 맞서 가슴 속 깊이 숨겨두었던 한 맺힌 고향 이야기를 마치 아름다운 화폭을 펼치듯 써내려갔다. 그것이 그의 대표작 ‘관촌수필’(1977년)로 완성되었다. 자신의 기억 속에서 지워나갔던 고향 갈머리를 서사의 공간으로 살려내고는, 그 속에 온전하지는 않지만 빼앗긴 아버지와 형의 존재를 기억의 끝자락에 매달았다. 그는 1974년 한국작가회의의 전신인 자유실천문인협의회 발기인으로 참여했으며, 이후 민족문학작가회의에서 이사, 부이사장, 이사장을 차례로 맡았다. 군사독재에 항거하며 민주화투쟁에도 적극 가담했지만, 한편으로는 소설가라는 이름으로 살아남기 위해 힘썼다.

그의 작품 ‘관촌수필’을 통해 갈머리가 문학적 명소(名所)로 살아났다고 하자, 생전 그는 웃으면서 자신의 아호인 명천(鳴川)을 한자로 내게 써보였다. 나는 ‘울음내’라는 대천 인근의 옛 지명을 댔다. 그러자 그는 “알고 있네” 하면서 반겼다. 관촌수필만으로는 성이 차지 않아서 아예 울음내를 아호로 쓰기로 했다는 거였다. 이제는 좀더 깊이가 있고 듬직하게 보일 수 있는 이야기를 쓰고자 서울을 떠났다고 그는 말했다. 단단히 결심을 하고 귀향한 그는 소설 ‘매월당 김시습’(1992년)을 썼다. 상당한 부수가 팔렸다. 자신의 뜻을 독자들이 알아주는 것 같아서 반가웠다고 그는 말했다. ‘장곡리 고욤나무’(1995년) ‘만고강산’(1998년) 등 후기 작품도 잇달아 나왔다.

문학적 성과들은 나왔지만 그는 “글쓰기가 자꾸 더 힘들어진다”고 토로하기도 했다. ‘매월당 김시습’을 쓰면서 몇 번이나 충남 부여군의 무량사(無量寺)라는 옛 절간을 찾아갔었다고 했다. 현실 정치를 뒤로 하고 김시습이 숨어 지냈던 무량사는 대천에서 성주산을 넘으면 갈 수 있는 곳이었다. “거기 그 절간을 가보면 그래도 옛날 모습이 남아 있어. 매월당이 어떻게 그 구석까지 숨어들어 왔었는지….” 상념에 젖은 이문구는 이야기 끝에 “한잔 할까? 그래도 바다가 보이는 곳으로 가야지” 하면서 나를 이끌곤 했다.

지난해 말 보령에 내려가 이문구의 생가 터와 집필실을 둘러봤지만 뒤늦게 글을 쓴다. 25일 이문구의 10주기가 더 많은 사람들에게 기억되기 위해서다. 그가 떠난 지 오랜 시간이 흘렀지만 그의 갈머리 생가 터는 휑하고, 집필실은 찾는 이 없이 쓸쓸히 서 있었다. 흐릿한 날씨 때문인지 더 처연하게 느껴졌다.

그간 고인을 기리는 노력이 없었던 것은 아니다. 이문구가 세상을 떠난 뒤 그의 삶과 그 문학을 기리기 위한 이런저런 모임들이 생겼다. 그리고 ‘이문구 문학관’을 만들자는 계획도 세워졌다. 보령에서도 뜻있는 이들이 상당히 적극성을 보였다. 그런데 갈머리 생가 터에 문학관을 세우고 싶어 하는 사람들의 생각과 보령시의 계획이 서로 어긋나기 시작했다. 그리고 오두막 집필실에 남겨져 있던 유품의 보관에 대해서도 유족들과 갈등이 생겼다. 갈머리 생가 터에 문학관을 짓고 오두막 집필실을 기념관으로 보존하고, 보령시의 축제와 연계해 이문구 문학제를 개최하자고 했던 계획이 모두 중단되었다. 그가 떠난 지 10년이 지났지만, 살아남은 이들이 아무것도 한 일이 없으니 부끄럽다.

이문구는 무덤을 남기지 않았다. 그는 위암으로 투병 중일 때에도 글 쓰는 일만을 생각했다. “좁은 땅덩어리에 내 봉분까지 만들 필요가 없다. 내가 태어난 고향 뒷산에 재 한 줌을 뿌리면 되지”라던 그의 말은 그대로 유언이 되었다. 그는 한 줌의 재가 되어 고향 갈머리의 솔밭 길 사이에 뿌려졌다. 허망한 이름자를 새기는 비석도 필요 없다고 했다.

문학관을 세우고 문학제를 열고 하는 일들도 이문구가 살아있다면 말도 안 되는 짓거리라고 나무랐을 것이 뻔하다. 하지만 그의 고향 갈머리의 뒷동산 솔밭 길이 너무도 허전하다. 그나마 그가 남긴 소설들은 스물여섯 권의 전집으로 묶였지만, 그의 체취가 남아있는 마지막 집필실이 이렇게 날로 퇴락해가는 것을 지켜보는 것이 마음 아프다.

정리=황인찬 기자 hic@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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