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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아일보|문화

[권영민의 그때 그곳]<5>시인 박인환이 1945년부터 3년간 낸 서점, 서울 종로3가 ‘마리서사’

입력 2013-01-07 03:00업데이트 2013-01-07 03: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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좌우 아우른, 모더니스트의 해방구
권영민 단국대 석좌교수(오른쪽)가 3일 찾아간 서울 종로구 종로3가 마리서사가 있던 자리는 보청기 가게로 바뀌었다. 이곳이 60여 년 전에는 문인들의 사랑방 역할을 했다는 것을 아는 이는 드물다. 황인찬 기자 hic@donga.com
《 프랑스의 여성 시인이자 화가인 마리 로랑생(1883∼1956). 로랑생은 조르주 브라크, 파블로 피카소 등과 교유하면서 현대미술의 새로운 경향에 일찍 접했고, 기욤 아폴리네르의 연인으로 장 콕토, 앙드레 지드 등과도 함께 어울리면서 프랑스 예술계의 중심에 서 있었다. 시인 박인환(1926∼1956·사진)은 이 자유분방한 여성 예술가의 이름을 따 광복 직후인 1945년 말 서울 종로3가 2번지에 서점 하나를 차린다. ‘마리서사(茉莉書舍).’ 시인이 열아홉 살 때 일이다. 》
강원 인제 태생인 박인환은 평양의학전문학교에서 공부하다가 광복을 맞았고 학업을 중도에 포기하고 서울로 올라온 후 부모의 도움을 받아 이 책방을 열었다. 박인환은 유난히도 책을 좋아했다. 책방은 20평(약 66m²) 남짓이었지만 서구의 예술과 문학 관련 서적을 많이 비치하고 있었다. 그러므로 마리서사가 문을 열자 새로운 예술에 목말라 하던 문인 예술가들에게 알려졌고, 곧바로 종로의 명소가 되었다. ‘말리(茉莉)’라는 한자어는 일본 모더니스트 시인 안자이 후유에(安西冬衛)의 시집 ‘군함 말리(軍艦茉莉)’에서 차용했다.

마리서사는 신간 서적만을 취급하는 고급 서점은 아니었다. 당시의 서점이 대개 신간과 중고 서적을 함께 취급하고 있었기 때문에, 마리서사에서는 광복 후 혼란기의 한국 서적보다 일본어판 세계문학전집이나 일본에서 간행된 세계 여러 문인의 시집과 소설집, 그리고 화집들이 서가를 장식했다.

당대의 시인이던 김기림 김광균 오장환 이시우 이한직 이흡 등이 단골손님이 되었고, 청년 문사였던 김수영 양병식 임호권 등도 이 서점을 드나들면서 박인환의 친구가 되었다. 새로운 미술에 뜻을 둔 화가들도 드나들었고, 영화인들도 거기에 끼어들었다. 문학을 열망하던 청년 박인환은 마리서사를 찾는 당대의 모더니스트, 자유분방한 예술가들과 자연스럽게 어울리면서 자기 문학 세계의 기반을 만들었다. 이러한 예술적 분위기를 놓고 김수영은 수필 ‘마리서사’를 통해 이렇게 평했다. ‘우리 문단에도 해방 이후 짧은 시간이기는 했지만 가장 자유로웠던, 좌우의 구별 없던, 몽마르뜨르 같은 분위기가 있었다.’

당시 첨예하게 대립되어 있던 좌우 문단의 분위기와는 달리 마리서사에 모여든 예술가들은 자유롭게 제2차 세계대전 이후 전개될 새로운 문학 예술에 관심을 두고 있었다. 마리서사에서는 누구나 자신이 꿈꾸던 예술의 세계를 당당하게 이야기했다. 좌익 문단 조직인 조선문학가동맹의 시분과를 책임지고 있던 김기림은 이곳에 자주 들러 오장환 설정식 이흡 등과 어울렸고 김광균 이한직 등과도 문학 이야기를 나누며 시간을 보냈다.

박인환의 고향인 강원 인제군 박인환문학관에 재현된 마리서사. 박인환문학관 제공
당시 한낱 문학 지망생에 불과했던 박인환은 이 같은 문인들과의 만남 속에서 문단의 분위기를 익혔다. 그리고 동년배의 김수영 조우식 임호권 등과 자유롭게 어울리면서 자기만이 누릴 수 있는 문학의 세계를 꿈꾸었다. 이렇게 마리서사는 광복 후 새로운 문학 예술이 싹트는 작은 텃밭이 되었다. 이 자유로운 공간 속에서 1930년대 김기림 등에 의해 이 땅에 뿌리를 내렸던 모더니즘 시운동의 기운이 문단의 신세대로 자연스럽게 이어졌다.

하지만 박인환은 1948년 경제적으로 큰 도움이 되지 못하던 마리서사의 문을 닫았다. 개점 후 3년이 채 안 됐다. 대한민국 정부가 들어설 무렵부터 그는 자유신문사 경향신문사 등에서 기자로 근무하면서 본격적인 글쓰기를 시작했다. 1949년 김경린 김병욱 등과 동인지 ‘신시론(新詩論)’을 발간하였고, 김수영 김경린 양병식 임호권 등과 함께 합동시집 ‘새로운 도시와 시민들의 합창’(1949년)을 펴냈다. 이 젊은 시인들의 사화집(詞華集)은 일제강점기에 왜곡된 근대를 비판하던 모더니즘 시 운동을 광복 후 새롭게 부활시켰고, 한국 현대시의 한 경향으로 자리 잡게 하는 신호탄이 됐다. 박인환은 1950년 6·25전쟁 당시에도 김차영 김규동 이봉래 등과 피란지 부산에서 문학 동인 ‘후반기(後半紀)’를 결성하고 모더니즘 시 운동을 이어 갔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그는 1955년 대표작 ‘목마와 숙녀’가 실린 첫 시집 ‘박인환선시집(朴寅煥選詩集)’을 낸 이듬해에 서른 살의 나이로 세상을 떠났다. 그가 평생 심취한, 스물일곱에 요절한 천재 시인 이상처럼 짧은 생을 살았던 것이다.

마리서사에 드나들면서, 박인환과 함께 어울리면서 문학의 꿈을 키웠던 시인으로 김수영을 손꼽을 수 있다. 박인환보다 다섯 살 위인 김수영은 수필 ‘박인환’에서 ‘그처럼 재주 없고, 그처럼 시인으로서 소양이 없고, 그처럼 경박하고, 그처럼 값싼 유행의 숭배자가 없었다’라고 박인환을 회고했다. 표면적으로 읽으면 폄훼하는 글 같지만, 사실 이 수필은 박인환의 죽음 뒤에 부쳐진 가장 속 깊은 우정의 만장(輓章)이다. 한 인간에 대한 절대적인 애정과 신뢰가 없다면 아무도 이런 글을 쓸 수가 없기 때문이다. 더군다나 김수영은 다른 수필인 ‘마리서사’에서 박인환의 작은 서점 마리서사가 광복 직후 문학 예술계에 새로움을 꿈꾸게 만든 환상의 공간이었음을 말해 주고 있지 않은가?

수은주가 영하 16도까지 떨어졌던 3일 마리서사를 찾아 나섰다. 탑골공원 정문에서 동대문 방향으로 가다 낙원동으로 들어서는 골목 모퉁이다. 지금은 한 보청기 가게가 들어섰다. 이 가게를 드나드는 사람들은 60여 년 전 서울의 내로라하는 예술인들이 여기 모였던 것을 알까.

서울 종로에서 마리서사 같은 작은 서점의 간판을 찾아보기 어렵다. 시인 예술가들이 서로 만나서 자유롭게 새로운 예술을 논할 수 있는 열린 공간도 드물다. 마리서사는 인제에 세워진 박인환문학관에 복제된 모형으로 남아 있고, 박인환이 세상을 떠나기 직전에 쓴 시 ‘세월이 가면’만이 가끔 흘러간 옛 노래처럼 불려지고 있을 뿐이다.

‘지금 그 사람 이름은 잊었지만/그의 눈동자 입술은/내 가슴에 있어.//바람이 불고/비가 올 때도/나는 저 유리창 밖 가로등 그늘의 밤을 잊지 못하지//사랑은 가고/과거는 남는 것/여름날의 호수가/가을의 공원/그 벤치 위에/나뭇잎은 떨어지고/나뭇잎은 흙이 되고/나뭇잎에 덮여서/우리들 사랑이 사라진다 해도/지금 그 사람 이름은 잊었지만/그의 눈동자 입술은/내 가슴에 있어/내 서늘한 가슴에 있건만’

정리=황인찬 기자 hic@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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