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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아일보|문화

[권영민의 그때 그곳]<4>6·25 당시 예술인들의 아지트, 부산 광복동의 다방 ‘밀다원’

입력 2012-12-24 03:00업데이트 2012-12-24 03: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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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란에 지친 예술혼 훈훈하게 보듬은 ‘꿀물이 흐르는 찻집’
1950년대 초 밀다원 다방이 있었던 곳(광복동2가 38-2)으로 추정되는 지점은 이제 의류 상점들이 차지하고 있다. 권영민 교수(왼쪽)와 소설가 허택 씨가 현장을 찾았지만 밀다원의 흔적조차 찾을 수 없었다. 부산=황인찬 기자 hic@donga.com
《 1950년 6·25전쟁이 발발하자 피란민들은 “남으로” “남으로”를 외쳤다. 당시 부산은 인구 20만 명 정도의 도시였지만 전국에서 100만 명이 넘는 피란민이 몰려들었다. 인산인해의 불안하고 지친 풍경. 이 가운데는 문인들도 있었다. 피란민들은 이제 더는 피할 수 없는 땅의 끝, 국토 남단의 항구도시에 도달했다. 미래는 불투명하고 하루하루의 생존이 급한 상황. 하지만 문인들은 이 절박한 피란도시에서도 예술의 꽃을 피웠다. 부산 광복동에 위치했던 다방 ‘밀다원(蜜茶苑)’이 그들의 아지트였다. 》

1950년대 초 부산 광복동, 남포동 일대에는 줄잡아 20여 곳의 다방이 성행했다. 광복동 네거리에서 시청 쪽으로 향한 길가 건물 2층에 있는 밀다원에는 유독 예술가들의 발길이 잦았다. 밀다원 바로 아래층에 피란 시절 ‘문총(한국문화예술총연합회)’의 임시 사무실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예술가들은 밀다원에서 만나 자신의 피란 체험을 털어놓으면서 삶의 고통을 잠시나마 잊고자 했다. 서로의 생존과 안위를 물었고 동질감과 존재감을 확인하기도 했다.

이 다방에서 작곡가 윤용하는 시인 박화목과 만나 유명한 가곡 ‘보리밭’을 만들었다. 가난한 화가 이중섭, 김환기, 백영수, 장욱진이 고통의 삶 속에서도 자신의 창작욕을 불태웠던 곳도 여기다. 이중섭은 이 다방 어느 구석에 앉아 유명한 은박지 그림들을 그렸다. 백영수는 피란지에서의 개인전을 이곳에서 열었다. 이처럼 예술가들은 밀다원에서 실의를 털어버리고 새로운 꿈을 얻었다. 이름 그대로 밀다원은 척박한 임시 수도에서 예술인들이 잠시나마 숨통을 틔우는, ‘꿀물이 흐르는 찻집’이 되었다.

사진작가 임응식이 촬영한 1953년 부산 한 다방의 실내 풍경. 임시수도기념관 제공
보통 다방 밀다원은 소설가 김동리의 단편 ‘밀다원 시대’(1955년)를 통해 기억되기 때문에 허구 속 이야기라고 받아들이기 쉽다. 하지만 이 소설은 ‘현실’에 가깝다. ‘밀다원 시대’에는 가난한 소설가 이중구가 등장하는데, 소설가 이봉구(1916∼1983)가 그 모델이다. 이중구는 서울을 떠나 피란길에 오르면서 병든 노모를 이웃에 맡길 수밖에 없었다. 그는 떨어지지 않는 발길을 돌리면서 한강을 건넜다. 아내와 자식들도 충청도 시골의 처가에 보내고는 혼자서 부산에 떠밀리듯 내려온다. 그가 낯선 부산 땅에서 멈춰 찾아든 곳이 바로 밀다원이다.

이중구와 같이 이 좁은 다방을 찾은 사람들은 마치 꿀을 찾아 잉잉거리며 모여든 벌 떼 같다. 이들에게 꿀은 무엇인가. 바로 문학이고 미술이고 음악이었다. 밀다원에서 예술가들은 예술을 논했고 창작에 나섰다. 소설 속의 비평가 조현식은 실제의 인물 조연현을 암시하며 오정수는 소설가 오영수임을 알 수 있다. 그런 까닭에 밀다원 시대는 피란 예술가들의 당시 상황을 그린 한 편의 다큐멘터리다.

‘밀다원 시대’는 부산 피란 당시 예술가라는 특정 계층을 중심으로 그들이 겪었던 고통의 시대를 그대로 재현하고 있다. 작가 자신이 그려내고 있는 인간상의 적나라한 모습에도 불구하고 이 소설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밀다원이라는 다방의 공간 그 자체다. 삶과 예술, 절망과 고통, 사랑과 비애, 배신과 갈등 등이 모두 함께 녹아들어 있는 이 특이한 공간은 바깥세상에서 전개되고 있던 전쟁과는 상관없이 강한 정서적 유대감으로 여기 모여든 예술가들을 한데 묶어놓는다. 밀다원은 이들의 마음을 따뜻하게 덮어주고, 의식주마저 제대로 해결하지 못한 채 허덕이는 이들을 훈훈하게 보듬어준다. 결국 작가는 피란지 속에서 발견한 밀다원을 하나의 유별난 안식처로 그려놓고 있는 셈이다.

하지만 밀다원은 가난한 시인 박운삼의 자살로 그 시대적 역할을 마감한다. 사고 후 실제로 다방은 1951년 12월 문을 닫았다. 문학이 지향하는 이상의 세계와 전쟁을 피하기 어려웠던 고통스러운 삶 사이에서 고뇌하던 시인은 두 개의 원고뭉치와 한 편의 마지막 유작시(遺作詩)를 남긴 채 이 안식의 공간에서 스스로 생을 마감한다. 소설의 이야기도 여기서 끝난다.

7일 진눈깨비가 흩날리는 부산에 내려가 광복동 네거리를 서성였다. 60년 전이나 지금이나 광복동 네거리는 인파로 붐비는 번화가다. 크리스마스를 상징하는 여러 휘황찬란한 불빛이 요란스러운 2012년의 광복동. 그곳에 이제 밀다원은 없다. 1950년대 초 성했던 다방들은 모두 사라졌다.

임시수도기념관과 부산에서 활동하는 소설가 허택 씨의 도움을 얻어 수소문 끝에 밀다원의 위치를 더듬었다. ‘광복동2가 38-2’로 추정되는 당시 밀다원 위치에는 번듯한 의류 상점들이 들어서 있다. 밀다원의 흔적을 찾기 힘든 그 언저리를 한참이나 서성였다. 아쉬움에 맞은편 프랜차이즈 커피숍에 들러 커피 한 잔을 마셨다.

1950년대 초 밀다원 모습을 재현해 놓았다는 임시수도기념관(임시수도기념로 45)을 찾았다. 아쉽게도 당시 밀다원의 모습을 기록한 사진 자료가 없어 추정으로만 밀다원 모습을 복원했다. 김동리의 ‘밀다원 시대’가 발표된 현대문학 1955년 4월호가 전시돼 있는 것은 다행이었다.

6·25전쟁 당시 대통령 관저로 사용됐던 시설로 현재는 임시수도기념관으로 활용되고 있다. 이곳 전시관에는 1950년대 초 밀다원 모습이 재현돼 있다.
부산 시민들, 부산을 찾은 외지인들이 광복동 거리를 걸으며 연말연시 분위기를 만끽하는 요즘이다. 이 거리에 몰려드는 사람들 가운데 이제 다방 밀다원을 기억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 밀다원은 그렇게 시간 속으로, 사람들의 기억 너머로 사라져 버렸다.

하나의 작은 공간이 한 시대를 오롯하게 담아내고 그 시대의 삶을 그대로 표상하는 경우는 그리 흔하지 않다. 공간이 시대를 담아내기보다는 시대 속에 공간이 특정 장소로 자리 잡는다. 거대한 피란의 물결이 그대로 멈춰 선 곳, 핍진했던 예술가들이 지친 몸을 잠시나마 누일 수 있었던 곳. 밀다원은 한때 현대 예술가들의 삶이 응축됐던, 그런 특별한 곳이었다.

정리=황인찬 기자 hic@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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