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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아일보|문화

[권영민의 그때 그곳]<3>광복 전후 이광수가 은거했던 남양주 사릉과 봉선사

입력 2012-12-10 03:00업데이트 2012-12-10 03: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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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 춘원… 사릉천변 산책길서 들은 광복소식
경기 남양주시 사릉천. 하천의 오른쪽에 인가가 있지만 이광수의 농막은 흔적을 찾을 수 없다. 1945년 8월 16일 아침 이광수는 이 천변을 거닐다 광복 소식을 처음 들었다. 남양주=황인찬 기자 hic@donga.com
《 1945년 8월 16일 아침. 경기 양주(현 남양주) 진건면 사릉리에서 살던 춘원 이광수(1892∼1950)는 이날도 집 근처 사릉천변에 산보를 나갔다. 하지만 풍경이 예전과 달랐다. 개천가에서 일본 군인의 감독 아래 자갈을 파는 노역을 하던 근로보국대 대원들이 웬일인지 일을 하지 않고 삽을 든 채 서성거렸고, 그 수도 평소보다 훨씬 적어 보였다. 게다가 일본 군인의 모습이 보이질 않았다. 그때 운허 스님이 두루마기 고름을 풀어헤친 채 바쁜 걸음으로 냇둑을 걸어오며 이광수를 향해 소리쳤다. “형님, 일본이 항복하였소. 어저께 오정에 일본 천황이 항복 방송을 했다오. 나는 지금 서울로 가는 길이오.” 이광수는 혼란스러웠다. ‘드디어 올 것이 왔구나.’ 》
경기 남양주시 봉선사의 다경실. 광복 후 춘원 이광수가 은거하며 수필집 ‘돌베개’와 ‘나의 고백’을 쓴 곳이다.
평안북도 정주에서 소작농의 아들로 태어난 이광수는 열 살 때 부모를 잃고 고아가 된 뒤 친일단체 일진회의 추천으로 도일해 메이지 학원 중학부에서 공부한다. 1917년 한국 최초의 근대 장편소설인 ‘무정’을 매일신보에 연재했고, 1919년 2·8 독립선언을 주도한 후 상하이 임시정부에 참여하기도 했다. 하지만 1937년 수양동우회 사건으로 투옥되었다가 풀려난 뒤 친일 행위가 두드러진다.

이광수는 1943년 말 도쿄에 건너가 최남선 등과 함께 일본 유학생들을 상대로 학병 지원을 격려하는 연설을 했다. 그러나 시국이 점차 험악해지자 귀국 후 서울 생활을 접었다. 이광수는 1944년 3월 아내와 자녀들을 서울에 둔 채 진건면 사릉리에 땅을 사고 조그만 초가를 지었다. 농사도 직접 지었다. 같은 정주 태생으로 불교 운동에 정진했던 삼종 이학수(운허 스님)가 근처 봉선사의 주지로 일하고 있는 것이 큰 도움이 되었다.

비록 시골 농막으로 거처를 옮겼지만 서울의 부름에는 언제나 마다하지 않았던 그였다. 1944년 6월 18일 조선문인보국회의 평의원으로 문학자 총궐기대회 의장을 맡아 결전 태세를 강조하는 강연을 하였다. 1944년 11월 11일부터 14일까지 중국 난징에서 열린 제3회 대동아문학자대회에 조선 대표로 참석했다. 광복을 맞기 직전인 1945년 상반기에도 이런저런 정치 행사에 얼굴을 내밀었고 친일 강연을 계속했다. 조선총독부는 그에게 중추원 참의 자리를 권했지만 그것만은 받아들이지 않았다. 이런 행적 때문에 그가 은둔을 자처하면서 혼자 살림을 살았던 사릉의 농막은 핑계에 지나지 않았음을 알 수 있다. 그는 직접 소를 사서 기르며 논밭을 갈아 보기도 했지만 이것은 한낱 호사가의 일에 불과했다.

이광수는 사릉천변의 산책길에서 광복의 소식을 접하고는 잠깐 혼돈 상태에 빠져들었다. 그는 자신의 삶과 그 족적을 다시 쓸어 덮을 수가 없음을 깨달았다. 차라리 죽어 버렸어야 했다고 생각했지만 죽음을 택할 용기도 없었다. 그는 병을 핑계 삼아 인근 진전읍 봉선사 절간으로 숨어들었다. 주지인 운허 스님이 경내에 작은 방 하나를 내주었다. ‘다경향실(茶經香室)’이라는 편액이 걸린 방이었다.

이광수는 여기서 몸을 숨기고 세상과 담을 쌓고 살아가리라 생각했다. 그리고 이 방에서 수필집 ‘돌베개’와 ‘나의 고백’을 썼다. 당시 문단에서는 일제강점기 문화 잔재 청산이 가장 중요한 슬로건이 되었고, 이광수의 이름 앞에는 ‘광적인 친일분자’라는 수식어가 붙었다. 이광수는 당시의 심경을 ‘나의 고백’에서 이렇게 털어놨다.

‘과거 칠팔 년 걸어 온 내 길이 그 동기는 어찌 갔든지 민족정기로 보아서 나는 정경 대도를 걸은 사람이 아니었다. 내가 조선 신궁에 가서 절을 하고 향산광랑(香山光郞)으로 이름을 고친 날 나는 벌써 훼절한 사람이었다. 전쟁 중에 내가 천황을 부르고 내선일체를 부른 것은 일시 조선 민족에 내릴 듯한 화단(禍端)을 조금이라도 돌리자 한 것이지만 그러한 목적으로 살아 있어 움직인 것이지만 이제 민족이 일본의 기반(羈絆)을 벗은 이상 나는 더 말할 필요도 또 말할 자격도 없는 것이다. 가장 깨끗하자면 해방의 기별을 듣는 순간에 내가 죽어 버리는 것이지마는 그것을 못한 나의 갈 길은 입을 다물고 가만히 있는 것이라고 나는 생각하였다.’

이광수의 자기비판은 단순한 개인적 윤리의식으로 치부하기 어려운 문제가 많다. 그가 살아왔던 삶과 그가 지향했던 문학은 모방과 굴종에서 비판과 저항에 이르기까지 식민지 문화가 드러내는 모든 문제성을 고스란히 배태하고 있었다. 그러므로 그의 때늦은 반성의 글쓰기는 친일적 행위에 대한 혹독한 자기비판으로 받아들여지기 어려웠다. 글을 통해 독자들의 신뢰를 받을 수 있는 길이란 글을 쓰지 않는 것보다 훨씬 어렵다는 것조차 그는 생각하지 못했다. ‘나의 고백’은 비겁한 자기변명처럼 들릴 수밖에 없었다.

지난달 23일 남양주를 돌며 이광수의 흔적을 찾아다녔다. 이광수가 머물렀다는 사릉의 농막(사릉리 520-1)은 지금 그 자취조차 찾을 길이 없다. 집터 근처에는 허름한 창고들이 들어섰고, 주변에 미루나무 몇 그루가 바람을 막고 서 있다. 이광수가 광복의 소식을 들었던 사릉천변에는 갈대와 잡초만 우거져 있다. 보잘것없는 이 시골 개천에 흐르는 물이 한 소설가의 영욕을 기억하는 듯하다.

춘원 이광수
이광수가 은둔했던 봉선사를 찾았다. 광릉 숲 입구 봉선사의 일주문에 들어서면 오른편에 나란히 늘어선 승탑과 비석들 끝자락에 ‘춘원 이광수 기념비’가 있다. 운허 스님의 배려로 1975년 세워진 것이다. 다른 비석들은 화강석에 용의 무늬를 새겨 넣은 ‘이수((리,이)首)’가 비석의 머리를 장식하고 있는데 춘원의 기념비는 갓이 씌워져 있지 않은 채로 눈비를 그냥 맞고 서 있다. 당초부터 갓을 만들어 씌우지 않았는지, 아니면 비석 위에 얹은 이수를 일부러 깨뜨려 버린 것인지 알 수 없다. 누군가 가혹한 형벌을 비석에까지 내리고자 한 것인가.

공교롭게도 이날은 운허 스님의 32주기 기신재였다. 분주하게 움직이는 스님들과 불자들 사이로 이광수가 머물렀던 ‘다경향실’이 눈에 띈다. 지금은 조실 스님의 요사채로 쓰인다는 이곳에서 이광수의 흔적은 찾을 수 없다. 그렇게 이광수는 우리 곁에서 애써 지워지고 있었다.

춘원 이광수. 그는 한국 근대문학의 맨 앞자리에 서 있지만 한국문학의 가장 깊은 정신적 상처다. 문학을 통해 한국 사회가 일제강점기에 추구했던 모더니티의 가치를 가장 먼저 문제 삼았던 사람이기도 하다. 그러므로 그가 서 있던 자리는 우리가 지금 서 있는 곳과 결코 다르지 않다.

정리=황인찬 기자 hic@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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