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종묵의 ‘한시 마중’]<25>여인의 꿈을 밟고 가는 새벽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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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입력 2012년 12월 5일 03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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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덕무(李德懋·1741∼1793)는 1768년 초겨울 여행을 떠났습니다. 이때까지 한양을 벗어나 먼 곳을 나가본 적이 없던 그가 스물일곱 나이에 처음으로 여행다운 여행을 하게 되었으니 마음에 풍정이 일었겠지요. 황해도 연안에 들러 하루를 묵었습니다. 이때가 음력 10월 22일이었습니다.

따스한 아랫목에 고운 여인과 누워 있는데 얄미운 닭은 새벽길을 나서라 울어댑니다. 닭 울음소리가 얼마나 얄미웠겠습니까? 얼마간 미적거렸겠지만 재촉하는 닭 울음소리에 결국 방문을 밀고 길을 나섭니다. 달은 서산으로 기울며 마지막 환한 빛을 드리우는데 별들도 반짝반짝 빛납니다. 두고 온 여인의 얼굴처럼, 눈동자처럼 그렇게 보였겠지요.

들판은 온통 안개가 끼어 몽롱합니다. 같은 때 쓴 멋진 서정적 기행문 ‘서해여언(西海旅言)’에서도 이날 새벽의 풍경을 두고, ‘관아의 닭들이 울어대는데 별빛이 깜박이고 달은 달려가고 있었다. 뿌연 안개가 가득하니 넓은 들이 강물처럼 보였다. 사람의 말소리는 몽롱하여 마치 꿈속에서 기이한 책을 읽는 듯하였다. 그다지 또렷하지 않지만 환상적인 풍광은 늘 보던 것과 달랐다’라고 한 그대로입니다. 그 풍경 속으로 삿갓을 쓰고 말을 탄 이덕무가 지나갑니다. 들판도 몽롱하고 정신도 몽롱합니다. 이 몽롱함이 갑작스럽게 여인의 꿈으로 바뀝니다. 두고 온 여인의 꿈속에다 자신이 주인공으로 되어 있는 풍경을 집어넣은 것이지요. 몽롱한 상태에서 여인을 생각하다 보니 자신이 여인의 꿈속으로 말을 타고 들어간 셈입니다. 그래서 여인의 꿈을 밟고 간다고 하는 멋진 표현이 나온 것입니다. 자랑할 만한 우리 시입니다.

이종묵 서울대 국어국문학과 교수
#한시#새벽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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